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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07.09.18
10522
제7장 너럭바위 위에 송죽을 헤치고 - 면앙정가비 앞에서(2) <마지막회>
너럭바위 위에 송죽을 헤치고 - 면앙정가비 앞에서(2) 이렇게 여러 가지를 보고 즐기니 몸이 쉴 겨를이 없다. 그러다 보니 청려장도 무디어 간다. 간 곳마다 아름다운 경치로다. 인간세상 떠나와도 내 몸이 겨를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쏘이려 하고 달도 맞으려 하니 밤일랑 언제 줍고 고길랑 언제 낚고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진 꽃이란 누가 쓸려뇨. 아침이 나쁜데 저녁이라고 싫을소냐 오늘이 부족한데 내일이라고 넉넉하랴 이 뫼(산)에 앉아 보고 저 뫼(산)에 걸어보니 번거로운 마음에도 버릴 것이 전혀 없다. 쉴 사이 없거든 길이나 전하리라. 다만 한 청려장(靑藜杖)이 다 무디어 가는 구나. 청려장. 이 지팡이는 노인에 대한 존경과 권위의 상징인 지팡이 중에서 최상품 지팡이이다. 1년생 풀인 명아주의 줄기를 말려서 만든 지팡이인 청려장은 재질이 가볍고 단단하여 노인이 짚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옛날 고사에는 신선들이 주로 청려장을 짚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지팡이의 이름이 명아주의 잎이 돋아날 때 색깔이 푸른색이라서 청(靑)자를 붙였다는 데, 푸른색은 영원함을 상징한다. 앞의 송순의 시 면앙정 삼언가에도 청려장이 나온다. ‘부여장 송백년(扶藜杖 送百年:청려장을 짚고 백년을 보내리라!).’ 한편 몇 년 전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받은 선물이 바로 청려장이란다. 특히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의하면 청려장은 중풍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어 노인들에게 선물로 적합하다고 한다. 이 청려장이 면앙정가에 등장하고, 앞에서 남여(藍輿 - 덮개가 없는 4인교 죽여라고도 하며 주로 산길을 갈 때 이용하였다 함)도 등장하는 것 보니 이 가사는 송순이 적어도 70살(1562년)은 넘어서 지은 가사라는 생각이 든다. 이어서 <면앙정가>는 술과 벗 그리고 노래와 거문고(또는 가야금, 송순은 가야금을 잘 탔다고 한다.)가 있는 신선놀음을 읊는다. 그래서 악양루 위에서 노는 이태백 보다 더 좋다고 노래한다. 술이 익었거니 벗이야 없슬소냐. 부르며 타며 켜며 흔들리며 온갖 소리로 취흥을 재촉하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라 붙었으랴. 누으락 앉으락 굽으락 젖히락 읊조리며 파람불며 마음놓고 놀거니 천지 넓고 넓고 일월도 한가하다. 의황을 모르더니 이몸이야 그로고야. 신선이 어떻던가 이 몸이 신선이로구나. 강산 풍월 거느리고 나의 백년을 다 누리면 악양루 위의 이태백이 살아와도 호탕 정회야 이보다 더할소냐. 그런데 이 가사는 내가 이렇게 이백처럼 유유자적한 것도 또한 역군은(亦君恩)이삿다(임금의 은혜이시도다.)라고 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 마지막 구절인 ‘이 몸이 이런 것도 역군은(亦君恩)이삿다.’는 면앙정가를 단번에 반전시키는 어구이다. 이 모든 것이 다 임금님의 성은 때문이라고 단순화하여 버린다. 하기야 50년간이나 벼슬을 한 몸이 임금의 은덕을 이야기 안하고 도연명이나 양산보처럼 은둔의 무위도가를 읊는다는 것은 조금은 낯 간지러운 일이었으리라. 한편 면앙정가에 대한 후세의 평은 극찬 이상이다.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면앙정가를 ‘송순(宋純)이 지은 것이다. 산수(山水)의 경치 좋음을 있는 대로 다 말하고 거기서 노는 즐거움을 늘어놓은 것으로 그의 흉중(胸中)에는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들어 있다.’고 평하고 있고,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송순과 정철의 가사가 훌륭하다고 극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가사는 우리말을 섞은 까닭에 중국의 악부와 더불어 견줄 수가 없다. 근세에 송순과 정철이 지은 것이 가장 훌륭하다. 그러나 입으로 회자되고 마는 데 지나지 않았으니 애석하다. ..... 근세에 퇴계가, 남명가와 송순의 면앙정가, 백광홍의 관서별곡,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사미인곡, 장진주사가 세상에 널리 전해진다. (후략) - <지봉유설 권 13> 여기에서 한 가지 더 밝힐 것은 송강 정철은 우리말 가락을 절묘하게 아름답게 묘사하는 기법을 송순으로부터 많이 배웠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엔 송순의 시도 송강집에 수록 되어 있어 송강작품으로 간주되는 경우도 있었다. 송강의 성산별곡은 송순의 면앙정가의 기법을 잘 따온 작품임은 웬만한 국어학자들은 다 안다. 송강의 관동별곡도 기봉 백광홍이 지은 <관서별곡>에서 그 기법을 배운 것이다. 여기에 그 예를 들어 본다. 먼저 면앙정가와 성산별곡이다. <면앙정가> 용천산 나린 물이 정자 앞 너븐 들에 올올히이 펴진드시 넙거든 기디마나 프르거든 희디마나 .............. 닷난듯 따르는 듯 밤낮즈로 흐르는 듯. <성산별곡> 창계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렀으니 직녀의 좋은 비단 그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치는 듯 요란도 하는 구나. <면앙정가> 술이 익었거니 벗이야 업슬소냐. 부르며 타며 혀이며 이야며 온갖 소리로 취흥을 재촉하니 근심이라 있으며 시름이라 브터시랴. <성산별곡> 엊그제 빚은 술이 얼마나 익었는가. 잡거니 밀거니 슬카장 거후이니 마음의 매친 시름 져그나 하리나다. 다음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과 기봉 백광홍의 <관서별곡>의 비교이다. <관서별곡>은 <관동별곡> 보다 25년 먼저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경기행가사이다. <관서별곡> 관서명승지에 왕명으로 보내실시 행장을 다사리니 칼 하나 뿐이로다 연조문 내달아 모화고개 넘어드니 .... 벽제에 말 갈아 임진에 배 건너 천수원 도라드니 송경은 고국이라 <관동별곡>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관동팔백리에 방면을 맡기시니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연추문 돌라드라 경회 남문 바라보며 ...... 평구역 말을 갈아 흑수로 도라드니 섬강은 어디메노 치악은 여기로다 이렇게 송강은 선배들의 시작(詩作) 기법을 잘 응용한 대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우리말의 감칠맛과 운율과 형용을 너무 잘 알고 있어, 서민들의 입맛에 맞는 어휘 선택과 탁월한 표현력, 시적 형상성을 꾸며내기 때문이다. 나는 송강이 이렇게 우리말의 조형성을 잘 구사하고 있는 것은 그의 나이 10세에서 16세까지 동안에 을사사화로 인하여 귀양을 간 아버지를 따라 다니면서 서민들의 생활을 접한 것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생각한다. 임금의 친척에서 귀양살이한 몸으로 떨어진 그의 어린 시절은 그에게 천국과 지옥, 가장 고상한 것과 가장 천한 것을 한꺼번에 경험하게 하였다. 그런 그였기에 서민들이 쓰는 우리말을 잘 구사한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리라. 나는 이제 면앙정가비를 다 보고 나서 정자 앞 들판에 있는 참나무 한 그루를 본다. 이 나무는 송순이 정자를 지은 후 기념으로 심은 것이라 전해진다. 이왕 이곳에 왔으니 송순의 묘를 찾으러 간다. 안내판이 세워진 쪽 오솔길로 100미터쯤 가니 무덤이 여러 개 있다. 그런데 무덤의 비석을 보니 송씨의 묘는 여러 개 있으나 송순의 묘는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다시 정자입구로 나와서 절이 있는 길을 가서 묘를 찾았으나 찾지 못한 채 그만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송강이 쓴 <면앙 송순 제문>을 읽는다. 송강은 면앙정 송순이 별세하자 즉시 담양으로 달려 와서 이 제문을 짓고 조의를 표하였다 한다. 슬프도다. 세상살이 험난한 길을 겪고 겪은 자 많으나, 그 넘어지지 않은 이 역시 드문데, 조정에서 계신 60여년을 대로로만 따르며, 마침내 크게 넘어지지 않은 이로 상공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저의 비통함이 사사로운 인정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아아! 슬프고 서럽도다. 면앙 송순. 그는 관용(寬容)과 대도(大道)의 학자였다. 그는 부인 설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이 해관(海寬)과 해용(海容)이었다. 앞의 ‘해(海)’ 항렬자 뒤에 붙인 이름자가 ‘관’과 ‘용’이다. 두 아들의 뒤 글자를 합치면 관용이 된다. 이는 그만큼 그가 관용을 신조로 하는 포용의 삶을 살았다는 증거이다. 그가 대도의 학자로 평가 받는 것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로 희생당한 사림들에 대한 비통함을 시로 표현하면서 큰 길을 가고자 노력하였기 때문이다. 면앙이란 그의 호가 말 해 주듯이 하늘에게도 사람에게도 진정 부끄러움이 없는 삶, 대도의 길을 가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우리말 표현을 정말로 잘 하여 송강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보니 정철은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남도 땅 창평에서 사는 동안 인연 운이 있어서, 인복(人福)이 있어서 당대 최고의 스승을 만났으니. 사촌 김윤제를 만나 그의 외손녀와 혼인도 하고 생활도 안정되었으며 하서 김인후에게는 도학과 초사를, 고봉 기대승에게는 근사록을 그리고 석천 임억령에게는 한시를, 송순에게는 우리말 가사를 배웠으니 그가 우리말 가사와 한시등에 능하고 과거에 장원급제한 것은 모두 다 이들 호남가단 최고수들의 덕분이라 하겠다. 창평은 송강에게 그의 고향보다 더 많은 은혜를 베푼 곳이다. 이제 나는 면앙정을 내려온다. 대숲을 내려오면서 하서 김인후의 <자연가>를 읊는다. 자연에 묻혀서 이 풍진 세상에 초탈한 우리네 선비의 삶을 노래한 절로절로 노래를.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 절로 물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생긴 인생이라 절로 절로 늙어가리. (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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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07.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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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너럭바위 위에 송죽을 헤치고 - 면앙정가비 앞에서(1)
너럭바위 위에 송죽을 헤치고 - 면앙정가비 앞에서(1) 한편 <면앙정부>를 지은 백호 임제와 송강 정철과는 서로 막역한 사이였던 것 같다. 송강과 백호가 송순의 제자이었으니 둘 사이에 교분이 있었으리라. 나는 <국역 송강집>에서 송강이 백호에 대하여 쓴 시들을 찾았다. 임자순 제(林子順 悌)를 이별하고 지음 새벽녘에 일어나 임 찾으니 임은 없고 은하수 구름 기운 두류산에 접했구려. 다른 날 죽림으로 찾아 준다면 아내 시켜 막걸리를 마련하겠네 임자순 제(林子順 悌)에게 주다 나그네 언제나 잠이 들건고 누 앞에 기세 찬 여울이 있네. 그대를 그리는 한 조각 꿈은 응당히 해남에서 돌아 올테지. 임자순 제에게 희증하다 백년을 긴 칼 차고 외로운 성에 기대어 바다로 술을 삼고 고래잡아 회를 치잤더니 가련한 이 내 신세 게으른 새와 같아 살림살이 기껏해야 일지에 지나잖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곳 면앙정에서 송강이 쓴 시를 한 수도 보지 못한 점이다. 그래서 송강이 송순에 대하여 쓴 시를 찾기 위하여 <국역송강집>을 다 뒤지었다. 마침내 나는 ‘면앙 상공의 화교(話敎)한 운에 봉증하다’ 는 시를 찾았다. 만 길 바위벽에 푸른 이끼 깎아내고 늙은 만년 안식처라 초당을 지었구려. 듣자니 신선 사는 정자가 멀지 않는 곳에 있어 가을 달, 봄바람에 흥취가 길어지네. 剔盡巖苔萬丈蒼 暮年棲息有茅屋 仙亭見說牛鳴外 秋月春風與更長 이렇게 나는 한참동안 면앙정 마루에서 면앙정에 얽힌 사연이 담긴 시와 문장을 보고 나서 마루를 내려온다. 그리고 면앙정 주변을 둘러본다. 앞에는 여러 산들이 보인다. 먼 곳에 금성산이 있다. 이제 나는 다시 <면앙정가비>가 있는 곳으로 간다. 면앙정가(俛仰亭歌). 면앙정 주변의 산수와 사계절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읊으면서 선비의 호연지기를 노래한 가사. 가사의 표현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묘사하여 조선가사의 별미라고 알려진 가사. 정극인의 <상춘곡>의 시풍을 잇고, 정철의 성산별곡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호남 가사문학의 정수를 보인 이 가사는 지금도 <중학생이 읽어야 할 고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면앙정가비>에는 앞면이 이렇게 써져 있다. 면앙정가비 俛仰亭歌碑 너럭 바위 위에 송죽을 헤헤고 정자를 언쳐시니 구름 달 청학이 천리를 가리라 두 나래 버렷는듯 옥천산 용천산 나린 물이 정자 앞 너븐 들에 올올히이 펴진드시 넙거든 기디마나 프르거든 희디마나 뒷면에도 가사가 이어진다. 쌍룡이 뒤트는 듯 긴 깁을 차 펴난듯 어드러로 가노라 므삼 일 비얏바 닫난듯 따르는 듯 밤낮즈로 흐르는 듯. 므조친 사정(沙汀)은 눈가치 펴졋거든 어즈러은 기러기는 므스거슬 어르노라 안즈락 내리락 모드락 훗트락 노화를 사이 두고 우러곰 좃니난뇨 이 노래는 송순선생의 면앙정가중에서 1절이다. 이가원 근서 이 비에 써진 글은 면앙정가의 앞 대목이다. 여기에서 <면앙정가> 전문을 처음부터 자세히 감상하여 보자. 면앙정가 무등산 한 줄기의 산이 동쪽으로 뻗어 있어 멀리 떨치고 나와 제월봉이 되었거늘 끝없이 넓은 들에 무슨 생각하느라고 일곱굽이를 한데 머움쳐서 무더기무더기 벌여 놓은 듯 가운데 굽이는 구멍에 든 늙은 용이 선잠을 막 깨어 머리를 얹어 놓은 듯하네. 그 다음에 <면앙정가비>에 적힌 ‘너럭 바위위에 송죽을 헤치고...’ 가 나온다. 이어서 가사는 다음으로 연결된다. 넓은 길 밖 긴 하늘 아래 둘러 있고 꽂혀 있는 것은 산인가 병풍인가 그림인가 실물인가 높은 듯 낮은 듯 끊어지는 듯 이어지는 듯 숨거니 보이거니 가거니 머물거니 어지러운 가운데 이름난 양하여 하늘도 두려워 않고 우뚝 선 모습이 추월산을 머리로 삼고 용구산 몽선산 불대산 어등산 용진산 금성산이 허공에 벌어져 있는데 원근의 푸른 언덕에 머문 것이 많기도 많구나. 흰 구름 뿌연 안개 노을 푸른 것은 산 아지랑이리라. 많은 바위와 골짜기를 제 집으로 삼아 두고 나며 들며 아양도 떠는 구나. 다음으로 가사는 춘하추동 사계절에 대한 생활로 넘어간다. 봄에는 남여를 타고 좁은 길을 가는데 녹양에 우는 꾀꼬리 소리가 교태스럽다. 오르거니 내리거니 장공(長空)에 떠나거니 광야를 건너거니 푸르락 붉으락 옅으락 짙으락 저녁 햇볕[斜陽]과 섞이어 細雨(가랑비)조차 뿌리는 구나. 남여(藍輿)를 재촉해 타고 솔 아래 굽은 길로 오며 가며 하는 적에 綠楊(푸른 버드나무)에 우는 꾀꼬리는 교태 겨워하는구나. 여름에는 녹음이 짙은 때에 난간에서 낮잠을 잔다. 나무 사이 우거져 녹음이 짙은 때에 백척(百尺) 난간에서 긴 졸음을 내어 펴니 水面의 凉風 (시원한 바람)이야 그칠 줄 모르는 구나. 그리고 가을에 벼가 익은 들판이 퍼져 있다. 된서리가 빠진 후에 산 빛이 금수(수놓은 비단)로다. 황운은 또 어찌 만경(끝없는 들)에 퍼져 있는고. 어부피리도 흥에 겨워서 달을 따라 부는 것인가 겨울에는 눈 온 뒤의 풍경이 좋다. 초목이 다 진 후에 강산이 매몰커늘 조물주가 헌사하여(야단스러워) 빙설로(얼음과 눈) 꾸며내니, 경궁요대와 옥해은산이 눈 아래 펼쳐졌구나. 건곤도 풍성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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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김세곤
07.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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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면앙정에서 (7)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면앙정에서 (7) 한편 송순과 소세양의 시와 소쇄처사의 시 사이에는 <하여면앙정(荷與俛仰亭)>이란 어제(御題) 편액이 붙어 있다. 이 편액을 살펴본다. 어제(御題) 호남교준유생응제시제(湖南校準儒生應製試製) 정조는 정조 22년(1798년)에 도과를 광주에서 실시하라고 명하였다. 이 때 광주목사는 서형수이다. 시제는 ‘하여면앙정(荷與俛仰亭)’이었다. 담양읍지에 가로되 송순의 아호는 기촌(企村)인데 20세에 과거에 올랐으니 그 문장력은 당세에 표준이요 으뜸이었다. 네 분 임금을 섬기고 관직에서 은퇴하여 고향 땅 언덕 위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면앙정이라 하였으니 대개 면앙이라는 뜻은 우주를 두루 살펴본다는 뜻이다. 선생께서 임금을 사랑했던 충성심은 많은 시구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급제에 오른 지 60주년 그날을 맞아 면앙정 위에서 베푼 잔치는 마치 급제에 오른 그 때와 같았으며 온 전라도가 떠들썩하였다. 술기운이 절반이나 취할 무렵 당시 수찬 정철이 가로되 우리 모두가 이 어른을 위해 죽여를 매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헌납 고경명, 교리 기대승, 정언 임제 등이 죽여를 붙들고 내려오자 각 고을 수령들과 사방에서 모여든 손님들이 뒤를 따르니 사람들 모두가 감탄하여 광영으로 여겼다. 이는 시로 옛날에도 없었던 훌륭한 행사였다. ( 김성기, 면앙송순시문학 연구, 국학자료원, 1998, p446에서 인용) 송순은 87세 때(1579년) 이곳 면앙정에서 그의 과거 급제 60돌을 축하하는 잔치인 회방연을 열었다. 이 잔치는 임금도 술과 꽃을 하사할 정도로 성대하게 이루어졌는데 송순이 침소에 들려고 할 때 송강 정철이 송순 선생의 남여를 직접 매어드리자고 제안을 하여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고봉 기대승, 백호 임제 등 네 사람이 남여를 직접 매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어제 편액에는 기대승도 이 남여를 매었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기대승은 이미 7년전(1572년)에 별세하였기 때문이다. 면앙집에 실려 있는 이 기록을 단순한 실수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의도적인 기록이라고 하여야 할까. 나는 이 기록을 의도적인 기록으로 생각한다. 송순의 회방연에 고봉 기대승이 참석한 것이면 그만큼 그 잔치의 명성이 더 높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의도적으로 참석자 명단에 고봉을 넣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16세기 중엽의 고봉 기대승의 명성은 퇴계 이황과의 7년간에 걸친 사단칠정론 편지 왕래로 인하여 매우 높았다.) 이 일화를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정조 시절에 정조 임금이 전라도 유생들에게 시험문제로 내었으니 송순은 꽤나 호남에서 유명한 사람이다. (한편 송순은 90세 까지 장수한 사람이다. 송순의 회방연은 송강이 두 번째 창평에 낙향하였을 때 열렸다.) 여기에서 나는 이 면앙정 마루위에 걸린 어제(御題)에 적힌 회방연 행사에 남여를 맨 네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주목을 한다. 고봉 기대승(1527-1572), 제봉 고경명(1533-1592), 송강 정철(1536-1593), 백호 임제(1549-1587). 이 네 사람의 인연은 정말 재미있다. 고봉은 송강의 스승이고, 제봉과 송강은 식영정 4선으로 서로 친구이고, 송강과 백호와도 친구이다. 그런데 고봉과 제봉과는 불편한 사이였던 것 같다. 나는 이런 인연들을 여러 책에서 찾았다. 먼저 고봉과 송강과의 관계이다. 송강은 고봉으로부터 근사록을 배우고 학문을 익힌다. 특히 선비가 평소 지녀야할 마음가짐과 행동도리를 고봉에게서 배운다. 고봉은 송강보다 9살 위이기는 하나 그는 나이 44세(선조3년 1570년))에 퇴계가 선조에게 추천하여 대사성(지금의 국립대총장)을 할 만큼 학문이 높았다. 또한 그는 조광조와 함께 못 다 이룬 개혁을 한 그의 숙부 기준의 기질을 닮아 매우 개혁적이었다. 고봉은 송강을 상당히 똑똑한 제자로 생각한 듯하다. 한번은 고봉이 일찍이 산에 올라 놀다가 수석 한 개를 보았다. 그 수석은 특이하게도 맑고 깨끗하였다. 그 때 어떤 이가 ‘세간 사람으로서 인품이 이에 비길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고봉은 ‘오직 정철이 그러하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고봉 기대승은 선조 5년(1572년) 11월에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 때 송강은 다음과 같이 제문을 짓는다. 기고봉 선생 제문 소자가 선생님을 사모한 지가 이미 오래이오나, 오늘에 이르러 더욱 간절해지는 까닭은 선비들의 풍조가 더러운데 물드는 것을 누가 능히 맑게 하며,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가 낮게 떨어지는 것을 누가 능히 높일 수 있겠는 가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것을 높이고 맑게 하실 분은 오직 우리 선생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가신 후로는 세상에 그럴 사람이 없사오니, 외로이 서 있는 사당엔 남기신 자취만이 눈에 선 하옵니다. 고봉이 세상을 뜬 당시에 송강은 37살이었다. 그는 부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 신원 선산에서 시묘살이를 하고 다시 벼슬길에 오른 때 였다. 이 시기는 아직 동서 당쟁이 본격화 된 시기는 아니었으나, 송강의 제문 내용으로 보아 사림들의 세속화와 패거리가 상당히 심각함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봉 기대승과 제봉 고경명과의 어색한 만남 이야기도 재미있다. 선조 4년(1571년) 3월 퇴계 이황의 장례가 있던 때 고봉은 멀리서나마 인사를 하려고 한 것인지 여러 제자들과 함께 무등산 규봉에 올랐다. 무등산에서 고봉은 ‘퇴계 선생의 장례날에 문수암에서’란 시 두수를 짓는다. 선생은 세상이 싫어 백운향에 가셨는데 천한 제자는 슬픔 머금고 이곳에 있네. 멀리서 생각하니 오늘 무덤에 묻히실 텐데 사방의 궂은 안개가 차츰 아득해지네. 한 기운이 유유하게 갔다가 돌아오니 화려한 집에서 황천으로 떨어짐을 어찌 견디랴. 산머리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속이 아프니 쇠약한 몸 백발 여생이 외로워졌네. 이 날 고봉은 창평의 식영정에서 하루를 보낸다. 거기에서 고봉은 제봉을 만난 것이다. 당시 고경명은 부친 고맹영과 장인 김백균이 이량의 당이었다는 이유로 파직된 상태이었다. 그런데 고봉은 이량을 탄핵한 사람이어서 두 사람의 만남은 상당히 불편한 만남이었다. 먼저 기대승이 고경명에게 시를 한 수 건넨다. 세속 떠난 정을 다하지 못하지만 인간사 혹은 어긋남이 있으니 잔과 소반을 주인과 손님이 같이 쓰며 고금의 일을 서로 나누다가 술 맛에 기울어 즐거움이 되고 노랫소리 들으니 노래가 절로 나온다 성산의 이 밤에 만났으니 백년의 회포는 쓸어버리세 비록 정치적으로 서로 어긋났으나 그런 인간사를 오늘은 털어버리자는 고봉의 말이 의미가 있다. 오늘 퇴계 선생의 장례날에 술이나 마시고 회포를 풀자는 말이 무척 인간적이다. 고봉은 이로부터 1년 후인 선조 5년 (1572년)에 별세한다. 반면에 제봉 고경명은 한동안 힘들었지만 고봉과의 만남 이후 10년 되는 해 1581년에 영암군수가 되어 다시 벼슬길에 오른다. 그리고 1591년에 동래부사를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창평에 사는 데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이다. 60세의 노장인 그는 분연히 두 아들과 함께 3부자가 의병으로 나선다. 의병장 고경명은 호남의 선비들에게 조선을 위하여 싸우자고 격문을 보낸다. 이 격문이 오늘날까지도 일부 식자층에게 잘 알려져 있는 ‘마상격문’(馬上檄文)이다. 이 격문은 최치원의 ‘황소격문’(黃巢檄文),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와 함께 3대 격문에 들어갈 만큼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옷소매를 떨치며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고 군중과 맹서하니,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는 천둥 울리듯 바람 치듯 달려오고, 수레를 뛰어 오르고 관문을 넘어가는 무리는 구름 모이듯 비 쏟듯 한다.”는 내용의 마상격문은 광주, 남원, 전주, 여산을 비롯한 전라도 선비들의 심금을 울려 6천명의 전라도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결국 그는 1592년 7월에 금산 전투에서 둘째 아들 고인후와 함께 전사한다. 그의 큰 아들 고종후도 1593년 진주성싸움에서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논개의 애인인 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한다. 한편 나는 <국역 송강집>에서 송강이 제봉을 위하여 지은 시를 찾아보았다. 송강이 지은 시는 ‘제봉의 운에 차하여’ 라는 시 이다. 손꼽아 헤어보니 산중 살이 십년이라 사직하고 다시 오니 백발이 새롭구려. 수석이랑 친구들은 사랑스럽지만 봉래산 소식은 아득하여라 산 바람 밤에 일어 마른 대 시름하고 고개에 달 갓 돋으니 바로 곧 미인이라 약 마시고 시 짓느라 잠 못 드는 데 지붕머리 종소리 맑은 새벽 알려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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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07.08.28
7602
제6장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 면앙정에서 (6)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 면앙정에서 (6) 이제 나는 면앙정 현판 오른편 마루로 자리를 옮긴다. 이 마루 위에는 송순과 소세양의 시가 적힌 현판, 소쇄처사 양산보의 시가 적힌 현판, 정조임금의 어제(御題)가 판각되어 있는 <하여면앙정 荷與俛仰亭> 편액등이 있다. 먼저 송순과 소세양의 시가 같이 걸려 있는 현판을 본다. 이 현판에 써진 소세양이라는 이름에 눈이 번쩍 뜨인다. 소세양(1486-1562)이라 하면 송도의 명기 황진이와 진한 사랑을 한 사람 아닌가. 그는 어떤 여인과도 같이 지내는데 30일간을 넘기지 않았는데 황진이 하고는 이 기약을 훨씬 넘겨 사랑에 푹 빠졌다 한다. 작년 12월 말에 종영된 KBS 2 TV 인기드라마 <황진이>에서 황진이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예조판서 김정한은 바로 소세양을 모델로 한 것이다. 황진이 역을 한 하지원은 이 드라마에서 김정한과 이별하는 날 그와 헤어지기 싫어서 이런 시를 읊는다. 그리움만 남아 달빛어린 마당에 오동잎은 지고 차가운 서리 속에 들국화는 누렇게 피어있네 다락은 높아 하늘과 한 척 사이라 취한 임은 무한정 술만 마시네. 흐르는 물소리 차가운 거문고 소리와 어울리고 매화 향기는 피리 소리에 스며드네. 내일 아침 우리 이별한 뒤에는 푸른 물결처럼 그리움이 길이 남겠지 奉別蘇判書世讓 봉별소판서세양 月下梧桐盡 월하오동진 霜中野菊黃 상중야국황 樓高天一尺 누고천일척 人醉酒千觴 인취주천상 流水和冷琴 류수화랭금 梅花入笛香 매화입적향 明朝相別後 명조상별후 情與碧波長 정여벽파장 이어서 황진이는 한양 간 임이 너무나 그리워서 꿈길에서라도 같이 만나고 싶은 마음에 다음 시 한 수도 읊는다. 꿈에서 만나요 보고 싶고 그리워도 만날 길은 꿈속밖에 없으니 제가 반가이 임을 찾을 때, 임도 저를 반가이 찾으소서. 바라옵건대, 멀고 먼 꿈길을 서로 달리 오가지만 일시에 꿈꾸어 같은 꿈길에서 서로 만나사이다. 夢 想思相見只憑夢 상사상견지빙몽 儂訪歡時歡訪儂 농방환시환방농 願似遙遙他夜夢 원사요요타야몽 一時同作路中逢 일시동작로중봉 이 한시를 읽으면 명기(名技) 황진이의 시 작법이 가히 명작이다. 농방환시환방농(儂訪歡時歡訪儂). 첫 글자가 농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글자가 농으로 끝나는 글 솜씨, 시제(詩題)가 몽(夢)이요. 1,3구의 운 또한 몽(夢)인 시 작법. 정말 걸작이다. 한편 황진이는 한양으로 간 소세양에게 다음 시조를 보냈는데 이 시조가 당시에 장안의 화제 거리였다 한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청산은 내 뜻이오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가실손가. 녹수도 청산 못 잊어 울어 밤길 예놋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소세양은 명종 시절에 우찬성으로 일하다가 은퇴하여 말년을 익산에서 살았다 한다. 그는 이곳 송순이 있는 면앙정에도 몇 번 들렀나 보다. 또한 그는 송강의 스승인 김윤제와도 친분이 있었다. 김윤제는 부안군수로 있을 적에 소세양에게 새우젓과 생선을 보내준 적이 있었는데, 소세양은 김윤제에게 고맙다고 사례하는 시를 쓴다. 가을비가 열흘 넘겨 땅에 꽃들 썩어가니 반찬 올린 오이 가지 오래도록 물렸는데 대소쿠리 성한 생선 멀리서 보내주니 처자식을 바라보며 내 홀로 자랑하오. 秋雨經旬土蝕花 盤饌久厭飣瓜茄. 筠籠遠惠莘莘尾 却對妻孥獨自誇. 소세양, 陽谷集 권4, 「謝扶安守金允悌 惠蝦醢及魚」 이제 나는 이 현판에 있는 송순과 소세양의 시를 감상한다. 먼저 송순의 시부터 음미한다. 지팡이 짚고 솔 그늘 사이를 한가로이 거니는 데 언덕은 시내 머리에 의지하였네. 처마머리에 물러난 해는 하늘까지 가기가 멀고 자리에서 보이는 산은 들을 둘러싸고 있네. 바람은 연기를 몰아 나무사이로 지내고, 구름은 비를 내리며 가을을 재촉하네. 오르락 내리락 내 홀로 흥이 나다가 이 세상에 이런 저런 수심도 있네. 黎杖松陰步步幽 岸中從倚玉溪頭 巡簷白日行天遠 對揚靑山護野圍 風引店烟遙度樹 雲將浦雨細隨秋 登臨自取武邊與 肯着人間段段愁 이 시에 차운하여 소세양은 아래와 같이 시를 쓴다. 차운 대나무와 수풀이 깊은 곳에 정자가 깊숙하니 백 척이나 끊어진 언덕 머리에 서 있네. 고인물이 가득할 땐 들까지 합해지고 뜬 구름이 걷히면 산봉우리가 둘렀네. 금성산은 비를 몰아 사방으로 보내고 무등산은 가을을 한 조각씩 나누어 놓았네. 꿈에 놀라 깨어보니 가슴이 텅 비었는데 봉래산에 원숭이와 학은 무슨 수심이 있으리오. 한편 어제(御製) 옆에는 소쇄원 주인장인 소쇄처사 양산보가 쓴 시가 걸려 있다. 양산보와 송순은 이종 사촌간이니 소쇄처사의 시가 이곳에 한 편쯤은 걸려 있음 직 하다. 차면앙정운 뭇 산은 연이었고 시냇물은 꼴꼴 흐르는데 한가로이 뒤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앞을 바라 보았네 들밭은 널찍한데 정자난간은 가파르고 오솔은 굽틀 굽틀 뜰방은 연이었네 큰 들에 펼친 등불은 모두가 나의 달빛이요 긴 하늘에 일어난 구름은 모두 인가에 연기로세 청평의 좋은 경치 구경할만해 푸른들 동쪽 산 오래도록 전하리라. 여기까지 읽어내려 가다가 그 뒤에 나오는 면앙정 시 구절은 눈에 익다. 단구를 찾기 어렵다고 무엇이 아쉬워 참으로 좋은 경치 이곳이 분명하다 널찍한 건곤은 너그러이 포용하고 바라보니 산수는 질펀하기만 해 풍상이 몇 해든가 솔과 대 늙었고 시주 즐긴 당년엔 벼루물도 말랐으리 난간에 기대어 눈동자를 돌려보니 세상과 인연하는 소식이 끊겠구나. 그리고 보니 후반부 구절은 내가 소쇄원 제월당에서 본 소쇄처사의 시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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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07.08.20
7198
제6장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 면앙정에서 (5)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 면앙정에서 (5) 지금까지 면앙정 정자에서 기대승의 <면앙정기>와 임제의 <면앙정부>를 음미한 나는 한쪽 마루 위에 붙어 있는 제봉 고경명과 석천 임억령의 <면앙정 30영>시를 본다. <면앙정 30영> 시는 김인후, 임억령, 고경명, 박순 등이 면앙정에 관한 30가지 정경을 시로 읊은 것이다. 그것은 추월취벽(秋月翠壁: 추월산의 푸른절벽), 용구만운(龍龜晩雲: 용구산의 늦은 구름), 몽선창송(夢仙蒼松: 몽선의 푸른 소나무), 서석청람(瑞石晴嵐 :서석산의 아지랑이), 금성고적(金城古跡: 금성산성의 옛 자취), 목산어적(木山漁笛: 목산어부의 피리소리), 사두면로(沙頭眠鷺: 모래톱에 조는 해로라기), 송림세경(松林細逕: 송림으로 뻗은 오솔길) 등이다. 먼저 석천 임억령의 면앙정 30영중 제1영인 ‘추월취벽(秋月翠壁)’ 을 감상한다. 빛나고 밝은 모양 연꽃이 막 피어나는 듯 푸르고 흰 빛깔 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는 듯 맑은 달 빛 멀리 보내주기 바라나니 날으는 새도 너머 날기 어려울 절벽이여. 다음에 제봉 고경명의 추월취벽 시도 감상한다. 쇠 같은 절벽은 검푸르구나. 깎아지른 봉우리 까마득한데. 가을바람 불어와 옷깃 날릴 제 동산의 밝은 달을 기다리노라. 또한 이 면앙정 현판에는 없으나 하서 김인후가 지은 면앙정 30영중 추월취벽 시도 함께 감상한다. 추월이라 산 이름도 좋으려니와 깎아지른 푸른 벽이 사면을 에워쌓네 시내 구름 부질없이 일어나지 마소 밤마다 맑은 빛이 돌고 돈다네. 한편 송순의 면앙정 삼언가 현판 옆에는 퇴계 이황(1501-1570)의 면앙정 관련 시와 하서 김인후(1510-1560)의 <면앙정운>시가 함께 적힌 편액이 있다. 이황와 송순은 송순이 선산도호부사로 있을 때 친교가 잦았다 한다. 퇴계 이황은 <차면앙정운>을 남겼고 송순 부친의 비문을 쓰기도 하였다. 여기에 붙어 있는 그의 시는 <차면앙정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퇴계와 하서의 시가 함께 있다는 것이 정말 인연이다. 하서는 그의 나이 24세에 그보다 나이가 9살이나 많은 퇴계를 성균관에서 만났다. 하서는 퇴계를 ‘영남에서 가장 빼어난 분으로서 문장은 이백과 두보와 같으며 글씨는 왕희지와 조맹부의 필력이라’고 칭송하였고, 퇴계도 하서를 ‘함께 더불어 사귄 이로서 오직 하서 뿐’이라고 하여 두 영호남 선비는 두터운 교우 관계를 가졌다. (한편 퇴계 이황의 호남과의 인연은 고봉 기대승과 7년간 사단칠정에 대하여 편지를 주고받음으로서 절정에 이른다. 이 ‘사단칠정논변’은 명종 시절 권신의 전횡에 숨 막혀 있던 사림들에게 신선한 청량제 역할을 하였다. 이(理)와 기(氣)에 대한 논쟁은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많은 사림들이 퇴계와 고봉 간에 오고 간 편지를 베끼고 돌려 보았다 한다.) 퇴계와 하서의 시들은 편액 글씨가 너무 희미하여 읽기가 힘들다. 나는 <면앙정집>에서 퇴계의 시를 찾았다. 일곱 구비가 높고 낮으며 두 냇물을 끌어당기니 푸른 비단 빛 같이 앞에 둘렀네. 처마에 매인 해와 달은 머뭇거리며 지내고 좌우로 둘러있는 영과 호(壺)는 아득하게 보이네. 늙은이의 꿈이 희미하니 옛일이 허무하고 그대의 도움이 쌓였으니 경치가 값지네. 사람마다 이 가운데 즐거움을 알려할 진데 청량한 바람과 상쾌한 달빛이 같이 전할 것이네 소나무 대나무 소소하고 산길은 깊은데 정자에 올라보니 산봉우리가 난간에 비꼈네. 그림 같은 그림이 은근히 비치며 냇가와 언덕은 광활하고 마름과 냉이는 군데군데 수목은 울창하네. 꿈속에도 깊은 관심은 꾸지람을 당하던 날이요 읊으며 생각나는 것은 무마되던 때이네. 어느 때 굽히고 우러러 보며 내 뜻을 따라서 그전에 사무쳤던 수심을 떨쳐버리는가. 한편 하서의 시는 <하서 김인후 시선>책에서 찾았다. 이 책에는 ‘면앙정 운’ 2수중 두 번째 시만 소개되어 있다. 두건에다 막대 짚고 주인 손님이 모였는데 숲을 둘린 작은 정자가 높고도 밝구나. 새벽 절 종소리는 바람 따라 들려오고 구름 깔린 넓은 하늘에 기러기는 먼 길 가네. 황혼에 달 떠오르면 산이 더욱 고요하고 동 트면 대나무 흔들려 이슬이 먼저 마르네. 한가한 가운데서 참맛을 얻었으니 만사가 유유하다 나와 무슨 관계인가. 이윽고 나는 동악 이안눌이 1610년에 담양부사 시절에 면앙정에 와서 쓴 글인 <차벽상운>편액을 대강 읽어 본다. 여기에 나오는 면앙정 오언시는 너무 좋다. 옛날에 무등곡 들으려고 누가 이 정자에 왔다 하였는고. 학의 날개는 구름 밖에 번득이고 용의 허리는 물굽이에 오그렸네. 昔聽無等曲 誰謂此亭來 鶴翼翻雲外 龍腰縮水隈 늦은 노을은 붉은 비단이 흩어졌고 개인 산 봉우리는 푸른 병풍이 열렸네. 알건데 참으로 신선의 집이니 읊으며 감회를 누를 길 없네. 晩霞紅綺散 晴峀翠屛開 認是眞仙宅 吟懷不自裁 이 짧은 시에 면앙정의 정경이 모두 담겨있다. 특히 학의 날개, 용의 허리와 붉은 비단, 푸른 병풍의 대비적 표현은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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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07.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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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 면앙정에서 (4)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 면앙정에서 (4) 면앙정부(俛仰亭賦)는 1576년 임제의 나이 27세에 지어진 것이다. 면앙집 제3권에 보면 84세의 송순은 1576년(병자년) 5월 18일에 임제에게 부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하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6일에 임제에게 글을 써주어서 감사하다는 답장을 쓴다.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 명종4년-1587 선조 20년). 그는 39세의 나이에 요절한 조선 최고의 풍류객이다. 무인인 그는 나이 35세 때 평안도 도사(종6품)로 부임하면서 송도의 황진이의 묘에 들러 관복을 입은 채로 술잔 올리고 제 지내며 추도시를 읊었다 하여 조정으로부터 파직을 당한 로맨티스트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난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나오는 이 시조를 양반 신분에 당시에 천시 받던 기생의 무덤 앞에서 예를 갖추고 읊었으니 자유분방함이 가히 풍류객답다. 임제는 전라남도 나주시 회진면 사람으로서 자는 자순(子順)이고 호는 백호(白湖)인데 어렸을 때는 규방 출입 등을 하다가 나이 20세에 학문에 뜻을 두어 29세에야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을 시작하였다. 그는 자유분방하고 기개 있는 풍류객으로 알려져 있는데 동서분당의 무리에서 초탈하여 굽혀서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왕따를 당하였다. 어느 한편에 가담하여야 살아남고 출세할 수 있었던 시절에 어느 무리에 구속당하기를 싫어했으니 소외될 수밖에. 또한 그는 격식과 현실에 비판적이어서 당시에 미치광이라고 회자되기도 하였다. (그가 지은 <면앙정부>는 그가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지은 것인데 여기에도 임제가 왕따 당한 상황이 나온다. “임제(林悌)는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주점에서 이름을 감추었네. 우스운 것은, 세상 사람들은 기상이 높은 나를 미치광이라고 하네.”) 대곡선생 성운의 제자로 알려져 있는 임제는 면앙정 송순의 제자이기도 한데 그는 무인으로서 칼과 거문고를 항상 가지고 다니며 호방함을 보여 그가 다니는 곳에는 여인과의 일화가 뒤따랐다. 이제 면앙정부(俛仰亭賦)를 보도록 하자 면앙정부 큰 고을은 남쪽에 놓여 있고 넓은 들판은 동쪽으로 펼쳐 있네. 용이 서려 있는 일곱 굽이요 선천적으로 아늑한 한 마을이었네 경치가 세상에 빼어난 별유천지요 바람과 달은 천만년 한가로웠네. 속인들의 발자취 몇 번이나 올라와 왔으련만 늙은 임의 눈에 보였네. 어린 시절부터 고기 잡고 놀았던 곳 안개 속에 고결하게 보였네. 숲 우거진 언덕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이내 몸 늙어서 다시 돌아와 이곳에 머물리라.” 처음 곽씨의 꿈은 헛되었고, 잡목만 거칠게 터는 폐허가 되었네. 훌륭한 경치는 감춘 채 드러내지 않고, 나무꾼의 노래와 목동의 피리 부는 곳이었네 이상한 꿈은 은자(隱者) 때문에 끝이 나고, 한가한 구름은 벌써 신선을 기다리네. 인품은 맑고 경관도 고요하니. 두 가지 아름다움 모두 다 합해졌네. 뜻은 비록 유안(幼安 ; 후한 때 처사인 관령 管寧의 자)을 사모했으나, 명망은 안석(安石: 진나라 사안석 謝安石을 이름) 보다 정중했네. 조정에 나아가서 일 하시니 학들이 임의 가심을 아쉬워하였네. 학이 찾아와 노래하니 꽃도 좋고 대나무도 좋아. 거북이 꾀를 어찌 빌릴손가. 날아가는 새 모습을 빨리 구상하였네. 지어진 정자의 모습은 사치와 검소의 중간이고 유람객들은 산수의 아름다움을 다 보았다네. 난간에서는 갖가지 형상 다 펼쳐있고 자리에서는 천리풍경이 바라보이네. 한번 굽어보고 한번 우러르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두텁도다. 북쪽으로 멀리 허공을 바라보니, 추월산 봉우리에 가을달이 비치고. 안개가 거쳤다가 다시 끼니 아침저녁으로 수시 변한 모습이로세. 서울과 소식이 막힌 지 얼마나 되었을까? 임금을 생각하니 옥 같은 모습일거야. 벼슬길에 오른 것에 대하여 그윽한 회포를 일으키고, 은자(隱者)를 부르는 노래 한 곡조를 읊조렸네. 남쪽을 바라보니 아스라하고 들판은 넓고 하늘은 나지막하구나. 여울물은 아득하고 아득한데 풀빛은 푸르름이 희미해지는 구나. 스님이 돌아갈 제 석양이 저물어가니 먼 산에 저녁노을 분명히 그어있네 따뜻한 태양은 처음으로 돌아왔건만 겨울눈은 아직도 두텁게 쌓여 있네. 향기는 산비탈에 차가운데 매화에서 봄소식이 새어나오는가. 작설차를 마시면서 거문고를 퉁기고 유란곡을 연주하지만 그 소리 아는 이 없구나. 청려장 짚고서 오고 갈 제 날마다 동풍이 불어오네. 버들은 찡그린 듯 푸름이 번성하고, 꽃은 웃는 듯 붉은 빛을 재촉하네. 꽃송이 꺾어 허리에 차고 산언덕에 외로이 서 있었네. 새는 속절없이 울고 꽃향기 다하였으니 애달프다 화사한 꽃 얼마나 갈 것인가 쇠잔한 봄은 한 바탕 꿈같은데, 비바람이 배꽃을 때리는구나. 또, 그늘이 무성하니 물가가 숨어 버렸고 서리 조금 내렸는데 나뭇잎은 붉게 물들었네. 넘치던 물 떨어져 가을 물 차갑고 구름이 걷히니 하늘이 맑도다. 반악의 희끗한 귀밑머리 어찌 슬퍼하리오. (역자 주: 반악은 동진의 문인으로서 용모가 아름다워 낙양의 거리를 수레를 타고 지나가면 부녀자들이 그에게 귤을 던져 수레에 가득하였다한다.) 송옥(초나라 굴원의 제자)의 수심을 나는 하지 않으리. 술동이를 열어놓고 누구를 기다릴 것인가. 달과 더불어 기약이 있겠지. 은하수는 맑고 별빛은 저문데, 기러기 울음소리 서글프게 들려온다. 밤은 차츰 깊어가고 이슬은 떨어지니 신선이 사는 열두 요대처럼 황홀하여라.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 향기를 맡으며, 도연명의 맑은 기풍을 생각하노라. 가을 소리 적막하니, 뜰에는 오동잎이 가득하다. 간혹 날씨가 흐렸다 맑았다 하여 이상한 것 같고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하니 주렴을 길게 거두었네, 구경할 만한 경치가 많기도 많다. 잠깐 사이에 내린 소나기는 분명 궁중군대(우림)의 창과 같고, 만길 되는 무지개는 여와씨의 돌을 방불하게 하는구나. 절간의 종소리 멀리 들려올 제 앞산에 노을이 어둑어둑 아침 창문에 새 우는데 차가운 숲에는 햇살이 밝구나. 그윽한 일 또한 즐길만 하니 한 그루 구붕정한 소나무 아래 앉아서 노닐고 나라를 근심하며 풍년 들기를 기대하노니 온 들녘에 누런 곡식을 즐거이 바라보누나. 악앙루는 보이지 않고, 등왕각은 이름만 들었는데 오직 이 정자 홀로 호남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었네. 악앙루기를 지은 범희문(范希文)은 떠나간지 오래고 등왕각서를 지은 왕발은 다시 불러올 수 없도다. 주인 어른의 강호에서 지내면서 펼친 풍류와 경륜 한 조각 충성된 마음으로 세 분 임금을 모신 백발노인이네. 옛날 강태공이 늙어서 출세함을 생각하면 국가를 도모하는 일에 어찌 조금이라도 흔들리겠는가? 무릇 많은 인재가 조정에 가득하다 하더라도, 속세와의 초연한 맹세를 저버리기 어려우리. 푸른 산이 우리 님을 저버리지 않았기에 사직하는 글 조정에 던지시었지. 욕심이 없기는 한운(漢雲)과 같았기에 물고기와 새도 벼슬하신 분을 의심하지 않는구나. 정자의 모습은 변하지 않고, 풍경도 그대로일세. 수건을 질끈 매고 농군의 옷을 입고서 휘파람 불며 한가로이 서성이니 사안석처럼 풍악을 울리면서 공북해와 같이 손님을 맞이하네. 이 정자에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이 정자에서 머리 숙여 땅을 보니 이 산정에서의 삶이 더 없이 좋구나. 이 정자에서 바람을 쏘이고 이 정자에서 달을 구경하니 한 푼의 돈도 들일 것이 없구나. 학의 모습처럼 더욱 깔끔하고 소나무 그림자처럼 건장하도다. 자하주(붉은 안개 빛 술) 마시면서 세월을 머무르게 하고, 신선을 초청하여 함께 어울리네. 임제(林悌)는 강호를 떠돌아다니며 주점에서 이름을 감추었네. 우스운 것은, 세상 사람들은 기상이 높은 나를 미치광이라고 하네. 매양 달 밝은 밤이면 그 노래를 읊조리며 이 몸도 임의 곁으로 가고 싶은 게 소원이었소. 다행히 면앙 선생을 한번 찾아뵙게 되어 나의 많은 빚을 갚게 되었도다. 가냘픈 노래를 부르고 술잔을 기울이며 휘파람 불며 외로운 등잔 아래 이별하였네. 산중에서 거처로 돌아오니 생각이 떠올라서 하루 밤에도 아홉 차례나 혼이 따라갔다오. 면앙 공으로부터 부(賦)를 지으라는 부탁은 받았으나, 나 이제 미사여구로 문장이나 꾸미는 보잘것없는 재주이로세. 그러나 부탁하신 공의 뜻을 저버리기 어려운 터이라 지금 부득히 이 글을 짓노라. 아아 ! 사람들은 인정에 이끌려 바깥으로 치닫고 세상의 눈은 명리로만 빠지는 데 쳐다보고 굽어보는 사이에서 공(公)은 홀로 즐거움이 있도다. 인간의 삶은 하늘과 땅과 함께 삼재(三才)라고 한다네. 마음은 허령(虛靈)하여 온갖 이치가 모두 갖추었거늘 이제 돌아감에 하늘은 높고 땅은 넓은데 눈을 들어 바라보니 상쾌하도다. 이 좋은 경치가 면앙공의 뜻에 어김이 있겠는가? 우러러보아도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하리. 나 누구와 함께 돌아갈 것인가? 진실로 이런 분과 같이 노닐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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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07.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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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 면앙정에서 (3)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 면앙정에서 (3) 앞글에서 기대승은 1558년 그의 나이 32세에 면앙정기(俛仰亭記)를 지었다고 서술한바 있다. 그는 이 해 7월에 등과하여 승문원 부정자 벼슬을 받았고 동년 11월에 휴가를 얻어 귀향하였다 한다. 그리고 고향에 머무르면서 면앙공 송순의 부탁을 받은 면앙정기를 지었다. 그 증거가 바로 면앙정기의 글에 나오는 “지금 완산부윤(完山府尹=전주시장)으로 있는 송공(宋公)이 사는 집 뒤 뒤 끊긴 기슭의 벼랑에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면앙정(俛仰亭)이라 했으니 앞서 말한 바대로 놀기에 적당하고 즐거움이 완전하다는 것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다른 곳에서 구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이다. 그러면 면앙정기 나머지 부분을 살펴본다. 빈 정자 안에서 바라보면 그 시원한 모습과 우뚝 솟은 산세가 이어져 구불구불 하는 듯 하고 뛰어서 나오는 듯 하니 마치 귀신이나 이상한 물건이 남몰래 와서 흥취를 북돋아 주는 듯하다. 정자의 동쪽에는 제월봉이 있는 데 이 산은 우뚝 솟았으며 그 한 쪽 가지가 편편하고 구불구불하여 서쪽 큰 들에 임하여 이 삼십리 사이에 뻗쳐 있는 데 모두 여석구비이다. 정자의 뒷 산에는 동서남북 수백리 거리에 높다란 산이 겹겹이 쌓여 있다. 산 이름을 기록하자면 기암괴석이 높이 솟아 있는 산은 용구산(龍龜山)이요, 발돋움하여 우뚝 서 있는 산은 몽선산(夢仙山)이며, 기타 옹암(甕巖), 금성(金城), 용천(龍泉), 추월(秋月), 백암(白巖), 그리고 불대(佛臺), 수연(修緣), 용진(湧珍), 어등(魚登), 금성(錦城)산 등 여러 산은 마치 곡식 창고와도 같고 혹은 성곽(城廓)같기도 하며 병풍 같기도 하고 언덕과도 같으며 와우(臥牛)같기도 하고 마이(馬耳)같기도 하다. 이 모두가 눈썹처럼 검푸르기도 하고 상투처럼 뾰족뾰족하기도 하며 숨었다 드러났다 하기도 하고, 아득하게 보이다가 보이지 않기도 하다. 그리하여 형태가 아침저녁으로 달라지는가 하면 기후는 겨울이 겨울 같지 않고 여름이 여름 같지가 않아 마치 기인(畸人=기이한 사람)이 요술을 부린 것도 같고 열부(烈婦)가 절개를 지키는 것도 같아서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오래오래 생각하도록 한다. 물이 옥천(玉泉)에서 근원하여 나온 것은 여계라고 하는 데 이 물이 바로 면앙정 뒤 기슭 앞을 감돌아 편편히 흐르는데, 물이 맑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장마에도 넘치지 않는다. 마치 양양하고 유유하여 흘러가면서도 멈춰 있는 것 같고 저녁노을에 고기들이 텀벙거리고 가을 달빛 아래에 백로가 날아든다. 그리고 용천(龍泉)의 하얀 물은 담양읍 쪽에서 구비치며 흘러내리다가 옥천 물과 함께 한 마장 쯤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서석산(무등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정자 왼쪽 세 번째 구비의 밖으로부터 비로소 모습을 보이는 데, 아래로 흘러 앞의 두 시냇물과 합류하여 바로 용산(龍山)에 이르러 혈포로 흐른다. 아득한 큰 들은 추월산 아래에서 시작되어서 어등산 밖까지 뻗쳐 있는 데 그 사이에는 도랑과 밭두둑이 널리 널려 있고 마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농부들은 그 사이에서 봄이 오면 밭갈이 하고 여름이 면 김을 매며, 가을에는 수확하면서 잠시도 쉬는 시간이 없으며, 사계절의 풍경 또한 이처럼 무궁히 펼쳐진다. 한 폭의 천으로 만든 두건을 쓰고 짧은 잠방이를 입고서 난간위에 기대고 있노라면 높은 산과 먼 시냇물 그리고 떠도는 구름과 노니는 새와 짐승과 물고기 등이 자유롭게 와서 내 흥취를 돋운다. 청려장(靑藜杖) 지팡이 짚고서 조용히 뜰아래를 거니노라면 푸른 연기는 저절로 멈추어 있고, 맑은 바람은 불어온다. 소나무와 회나무에서는 바람소리 들리고 꽃나무는 향기를 뿜는다. 이렇듯 육신을 잊어버리고 조물주와 즐겁게 놀고 있으니 어찌 아름답다 아니할까. 아! 아름답다 이 정자여. 그 안에 있어 보면 빙 둘러 있는 산과 그윽한 경치를 두루 잘 보겠고, 그 밖을 바라보면 아득한 창공은 가히 호탕한 외모를 풍기니, 옛날 유자(柳子: 중국의 문장가 유종원을 말함)의 말대로 “놀기에 적당한 것이 대개 두 가지가 있다”고 한 것은 아마 이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일찍이 정자에 올라 공을 면앙정에서 뵈었더니 공은 나에게 말하기를 “이 정자를 짓기 이전에 이곳에서 곽씨(郭氏)라는 분이 살았는데 하루는 곽씨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금과 옥으로 만든 어대(魚帶)를 띤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앉아있는 꿈이었다.”고 한다. 이어서 공이 나에게 말하기를 “곽씨는 자기 집안이 장차 크게 잘 될 징조라는 생각에서 노승에게 아들 글공부를 부탁하였건만 그 아들은 성공하지 못하고 가세 역시 곤궁하게 되자 그는 살 곳을 옮겨 갔다. 그리하여 내가 이 터를 취득하게 되었는데 지난 갑신년(1521)에 재산과 돈이 많은 마을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서로 축하한다며 하는 말이 「기특한 이 땅을 공께서 취득하셨으니 이전 날 곽씨의 꿈속에 오늘날의 징조가 있었다.」고 하였다. 나 또한 이곳 산수를 사랑했지만 관직에 있는 몸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고 그 뒤 계사년(1533)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비로소 햇볕을 가린 정도의 초정(草亭)을 세워 5년이라는 세월을 즐겁게 놀다가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게 되자 정자는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초목만 무성해지고 말았다네. 경술년(1550)에 관서(關西) 지방에서 귀양살이 하는 몸이라 온갖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기에 이곳에 정자를 다시 세우지 못한 것이 만년의 한이 되었는데, 다행히 신해년(1551)에 나라의 은혜를 입고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와 지난날 가졌던 계획을 조금이라도 실천하고 싶었지만 재력이 없어 하루하루 생활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담양부사 오겸(吳謙)이 찾아와 이곳을 함께 관람하고 나에게 정자를 지으라고 권고하면서 협조하겠다고 하였다네. 그리하여 임자년(1552)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공사를 끝내니 정자는 제 모습을 드러내고 좌우의 숲들은 한층 더 싱그럽게만 보였네. 이 정자에서 나의 여생을 보내고 싶은 소원을 이루었으니, 아! 내가 이 땅을 취득한지 이제 30여년이 되었건만 그 사이 인간사의 얻고 잃음은 진실로 말하기 어렵고, 정자가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졌으니 이 또한 운수가 있다 하겠네. 이 일을 살펴보면 감회가 절로 나니 이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네. 자네에게 부탁하니 자네가 나를 위해 면앙정기를 지어 주게나. “ 이에 나는 글 솜씨가 부족하므로 한사코 사양하였으나 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공에게 말하였다. “ 저 푸르른 하늘을 누가 우러러보지 않으며, 아득한 이 땅을 누가 고개 숙여 보며 서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러한 줄 알면서도 능히 자신에게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은 적다고 할 것입니다. 이제 공은 이미 마음속에 느낀 바를 정자 이름으로 지었으니 이런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진실로 일반인으로서는 감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물의 변화는 무궁하고 인생이란 끝이 있는 것이니, 끝이 있는 인생으로서 다함이 없는 변화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사이에 천지의 영허(靈虛)함과 인물의 영쇄하는 이치를 또한 가히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니 그렇게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이요. 어찌 산수의 승경만을 즐거워 할 것인가. 아! 우리 공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 정자 이름처럼 면앙(俛仰)이라는 이름을 감당하리오. “ 이 얼마나 수려한 문체의 글인가. 문장이 너무 좋고 훌륭하다. 이렇듯 기대승의 문장 솜씨가 탁월하였기에 송순은 성산가단의 기라성 같은 많은 문인들을 놓아두고 약관 32세의 그에게 글을 지어달라고 부탁 한 것이다. 한편 송순은 면앙정을 칭송하는 면앙정부(俛仰亭賦)를 백호 임제에게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백호 임제(1549-1587)하면 개성 기생 황진이 묘에 잔을 붓고 제를 올린 조선 최고의 풍류객이다. 기(記)가 이성적이고 지적인 글이라면 부(賦)는 감성적이고 미적인 글이다. 그래서 송순은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기대승에게는 기를 부탁하고 감성적이고 로맨틱한 임제에게는 부를 지어달라고 부탁한 것이리라. 이 면앙정부에 대하여는 다음호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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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07.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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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 면앙정에서 (2)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 면앙정에서 (2) 이제 면앙정으로 발길을 옮긴다. 면앙정은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규모인데, 가운데에 한 칸짜리 방이 있고 사방에 빙 둘러서 마루가 깔려 있다. 이 정자 뒤는 벼랑이고 전망의 중심은 정자 뒤편에 있다. 여기에서 바라보면 멀리 이어지는 산줄기들과 언덕 아래에 깔린 평야, 그 위로 탁 트인 하늘이 시야에 들어온다. 면앙정은 송순이 41세(1533년)때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이다. 그가 면앙정을 지은 것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원래 면앙정 터에는 곽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 어느 날 금어(金魚)와 옥대(玉帶)를 두른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오락가락 하는 꿈을 꾼 그는 자기 아들이 벼슬을 할 것이라 여겨 아들을 공부 시켰는데 뜻대로 되지 않고 집안마저 가난해졌다. 곽씨는 이곳의 나무를 다 베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고 송순이 그 터를 사 놓았다가 나중에 정자를 지었다. 뒷날 이곳이 소위 면앙정 가단을 이루어 당시에 이름난 학자, 가객, 시인들의 창작의 산실 휴식처가 된 것을 보면 곽씨가 해몽을 틀리게 했지만 꿈은 제대로 꾸었던 것 같다. 송순은 1524년에 곽씨로부터 매입한 이 갈마음수 명당자리에 1533년에 면앙정을 짓는다. 곽씨의 꿈대로 면앙정을 드나드는 출입객들은 호남제일의 가단을 형성하였다. 여기에는 임제, 김인후, 고경명, 임억령, 박순, 소세양, 윤두수, 양산보, 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며 시 짓기를 즐겼다. 특히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면앙정삼언가〉·〈면앙정제영〉 등 수많은 한시(총 505수, 부1편)와 국문시가인 〈면앙정가〉 9수,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오륜가〉 등 단가(시조) 20여 수를 지어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면앙정가단은 그 후에 나타난 호남의 성산가단(星山歌壇), 영남의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노가재가단(老稼齋歌壇)보다 선구이며, 영남의 가단이 전문 가객 중심이라면 면앙정가단은 사대부 출신의 문인 가객이 중심이었다.) 그가 이 초가 한 칸 정자를 지은 후 지은 것으로 보이는 아래 시는 너무나 유명한 자연시이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드릴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면앙정자 앞에서 나는 맨 먼저 <면앙정(俛仰亭)> 현판을 보았다. 한문 글씨가 또박또박하게 잘 써져 있다. 이 글씨는 당대의 명필 성수침이 썼다 한다. 청송 성수침(1493-1564)이라면 소쇄옹 양산보가 15세에 조광조 밑에서 수학할 때 같이 공부한 성수침, 성수종 형제가 아닌가. 아우 수종과 함께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한 그는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천거되었으나, 곧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 조광조가 처형되고 그를 추종하던 많은 유학자들이 유배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두문불출했다. 이때부터 경서를 두루 읽고 태극도(太極圖),〈통서(通書)〉등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송순은 면앙정 현판 글씨를 받기 위하여 성수침이 사는 경기도 파주까지 찾아갔다 한다. 그런데 성수침의 아들이 바로 우계 성혼이다. 나는 면앙정 현판을 쓴 성수침이 송강 정철의 분신과 다름없는 우계 성혼의 아버지라는데 대하여 세상의 인연이 이렇게 기묘함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이윽고 나는 신발을 벗고 정자 마루로 오른다. <면앙정> 현판이 붙은 왼편 마루 위에는 송순의 <면앙정 삼언가> 퇴계 이황의 시와 하서 김인후의 시가 함께 적힌 현판, 석천 임억령과 제봉 고경명의 <면앙정 30영시>편액, 그리고 동악 이안눌의 <차벽상운> 현판 등이 붙어 있다. 먼저 송순의 <면앙정 삼언가> 편액부터 본다. 俛有地 仰有天 亭其中 興浩然 招風月 揖山川 扶藜杖 送百年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그 가운데 정자를 짓고 흥취가 호연하다. 바람과 달을 불러들이고, 산천을 끌어 들여 청려장 지팡이 짚고 백년을 보내네. 이 얼마나 담백하면서도 자연과 함께 노는 무위도가인가. ‘면유지 앙유천이라’.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이 첫 구절에 송순의 마음이, 그리고 이 정자의 이름을 면앙정이라 한 뜻이 모두 담겨 있다. 원래 면앙(俛仰)은 하늘에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사람에게 굽어보아 부끄러움이 없는 것(앙불괴어천 仰不怪於天, 부부작어인 俯不作於人)이 큰 즐거움이라고 한 <맹자> 진심장(盡心章)에서 말한 부앙을 조금 바꾼 것이다. 부나 면은 모두 굽어본다는 의미이니 송순이 부를 면으로 바꾼 것 같다.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이 실려 있다. 부모가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一樂)이고,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며(仰不愧於天이며 俯不作於人이 二樂也),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三樂)이다. 면앙은 바로 이락 二樂인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 부부작어인(俯不作於人)”의 의미를 가져다 쓴 것이다.) 송순이 살았던 당시는 기묘사화, 을사사화가 일어난 때로서 지조있는 선비들이 살아가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런 때에 면앙이란 뜻은 송순 자신의 수신(修身)이요 삶의 길이었다. 이런 인생관이 위 시 <면앙정 3언가(俛仰亭三言歌)>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하겠다. 한편 송순은 1552년, 그의 나이 60세에 당시 담양부사 오겸의 도움을 받아 면앙정을 중축한다. 그리고 스스로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땅을 내려다보기도 하며 바람을 쐬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게 되었으니 나의 본래 원하는 바가 이제야 이루어 졌다’라고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봉 기대승(1527-1572)에게 <면앙정기(記)>를 백호 임제(1549-1587)에게 <면앙정부(賦)>를 지어 달라고 부탁한다. 기대승의 면앙정기 여기에서 먼저 기대승이 쓴 <면앙정기>를 살펴본다. <면앙정기>는 면앙정에 대한 중수내역과 그 배경 등에 관한 산문이다. 이 글은 기대승의 나이 32세인 1558년, 66세의 송순이 완산(지금의 전주)부윤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지어졌다. 고봉 기대승은 당시 유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과 4단 7정론(四端七情論)을 논한 논리와 철학에 뛰어난 사람으로 대사간을 지낸 선비이다. 1527년 광산에서 태어난 그는 1544년 그의 나이 18세 때 광주목사로 있던 51세의 송순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된다. 기대승의 집안은 원래 본관이 행주(지금의 경기도 고양시)로서 명문 집안이었는데 그의 삼촌 기준(奇遵)이 조광조와 함께 1519년 기묘사화에 연류되어 화를 입게 되자 전라도 광산으로 내려와 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호도 옛 본향인 행주의 고봉현을 마음에 잊지 않고 새기는 의미에서 고봉으로 하였다 한다. 그는 산문 솜씨가 탁월하였다 한다. 이 <면앙정기>도 명문중의 명문장이다. 그러면 송순의 <면앙집> 7권에 있는 <면앙정기>를 감상하여 보자 면앙정기 큰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땅은 한낱 한 덩어리의 흙덩이인데 이것이 깊어져서 강이 되고 우뚝하여져서 산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하나의 흙덩이에서 강물이 흐르고 산맥이 뻗어 내렸다. 인간이란 하늘의 명을 받고 땅의 정기를 받아 산수간(산수간)에 놀고 거처하는 데 눈으로 보면 사랑스러울만하고 귀로 들으면 즐거운 아름다운 경치를 조물주가 인간에게 제공하여 주는 듯하다. 그러나 유람지로서 적당한 곳을 구하여 볼 때 나의 귀와 눈에 싫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반드시 높은 산을 넘고 아득한 곳으로 나간 뒤에야 그 온전한 곳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만일 수백리 넓은 들판에 기이한 산수가 있다면 나는 이 언덕 위에 올라 앉아 노닐며 즐거워하고 싶건만 어찌 해야 할 것인가. 지금 완산부윤(完山府尹=전주시장)으로 있는 송공(宋公)이 사는 집 뒤 뒤 끊긴 기슭의 벼랑에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면앙정(俛仰亭)이라 했으니 앞서 말한 바대로 놀기에 적당하고 즐거움이 완전하다는 것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다른 곳에서 구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공의 선조 중에 한 분이 연로하여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기곡리(錡谷里)에서 거주하였기에 자손이 대대로 살았으니 노송당(老松堂)의 옛터가 남아있다. 기곡리에서 북쪽으로 2∼3리도 채 못 되는 곳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는데 산을 등지고 양지바른 곳에 있으며 토지가 비옥히고 샘물이 좋다. 이 마을 언덕 위에 집이 하나 있으니 공이 지은 것으로 마을 이름은 기촌(企村)이라고 한다. 기촌의 뒷산은 서려있고 울창하며 가장 빼어난 봉우리는 제월봉(霽月峰)이라고 한다. 기촌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제월봉 능선에는 용이 서린 듯하고 거북이가 고개를 쳐드는 것 같이 구불구불하고 높이 솟아 있는 곳이 있으니 이곳에 바로 면앙정이 있다. 면앙정은 모두 3칸 건물로 긴 상량(上樑)을 얹어서 상량이 도리보다 배나 높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를 보면 단정하고 확 트였으며 판판하고 바르며 그 모서리는 깎아지른 듯 하여 새가 날개를 펴고 나는 듯하다. 사면을 비우고 난간을 세웠으며 난간 밖은 지형이 다 약간의 벼랑인데 서북쪽은 특히 절벽이다. 뒤에는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 있고 아래에는 삼나무가 무성하다. 정자 아래에는 암계촌(巖界村)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산에 돌이 많고 깎아지른 듯이 험악하므로 이름을 암계촌(巖界村)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동쪽 뜰 아래에는 약간 아래로 내려간 산세로 인하여 확 터놓고 온실 4칸을 지은 다음 담장을 둘러치고는, 아름다운 화초를 심어놓고 방안에는 서책(書冊)으로 가득 쌓아 놓았다. 산 능선을 따라 좌우 골짜기에는 소나무와 무성한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다. 정자가 있는 곳은 이미 지형이 높아 한층 더 상쾌하게 보이고 대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인간세상과 서로 접하지 않으니 아득하여 마치 별천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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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07.07.18
8421
제6장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 면앙정에서 (1)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보면 하늘이라 - 면앙정에서 (1) 송강정에서 면앙정까지는 차로 얼마 안 걸린다. 유산교를 지나 봉산면 방면으로 가서 봉산파출소를 지난 후에 2분정도를 더 가니 면앙정 입구가 나온다. 차에서 내리니 면앙정이라고 표시된 큰 비가 하나 있다. <도 기념물 6호, 면앙정 1992.10.3>이라고 써진 비이다. 면앙정으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잔뜩 우거진 대숲 비탈 사이로 돌계단이 이어져 있다. 이 계단을 한참 올라가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너른 평지가 나오고 그 언덕 끝에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이 정자가 바로 면앙정이다. 면앙정은 담양군 봉산면 제월봉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다. 제월봉이란 이름은 송나라의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물됨을 평한 <여광풍제월>의 그 제월,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빛’에서 따온 것 같다. 그런데 면앙정은 이 정자의 이름이면서 면앙정을 지은 송순의 호이기도 한데, 여기서 ‘면앙’이란 ‘땅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쳐다본다.’ 는 뜻으로, 아무런 사심이나 꾸밈이 없는 넓고 당당한 경지가 담겨져 있다. 정자를 가기에 앞서서 나는 안내판이 있는 곳부터 먼저 간다. 거기에는 <안내판>과 <면앙정가비>와 <면앙정 중수기적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맨 먼저 안내판부터 자세히 본다. 면앙정 (俛仰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이 정자는 면앙 송순 (1493-1582)이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지은 것이다. 송순은 퇴계 이황 선생을 비롯하여 강호제현들과 학문이나 국사를 논하기도 하였으며, 기대승, 고경명, 정철, 임제등의 후학을 길러냈던 유서 깊은 곳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전면과 좌우에 마루를 두고 중앙에는 방을 배치하였다. 골기와의 팔작지붕이며 추녀의 각 귀퉁이에는 기둥이 받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여러 차례 보수한 것이며, 특히 현재의 건물은 1979년 지붕을 올려 오늘에 이른 것이다. 면앙 송순(1493 성종 24∼1582 선조 15). 그는 국문가사 <면앙정가>를 쓴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서 면앙정 가단(俛仰亭 歌壇)의 창시자이다. 본관은 신평, 자는 수초 또는 성지, 호는 기촌 또는 면앙(면앙정)인 그는 담양군 기곡면(지금의 봉산면) 기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3세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9세 때 곡조문(哭鳥文)이라는 시를 지어 주위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 신동이었다. 나는 사람이고 너는 새이니 새의 죽음을 사람이 곡하는 것은 맞지 않으나 네가 나 때문에 죽었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유년기에 그는 숙부 송흠으로부터 글을 배웠으며 21세에 진사가 되어서는 당시 담양부사인 눌재 박상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26세 때는 송세림에게 수학하였다. 그는 나이 26세(1519년 10월) 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시험관이었던 조광조, 김구 등은 그를 보고 김일손 이후 이런 뛰어난 문장가는 없었다고 칭찬하였다 한다. 그런데 그 해 겨울에 기묘사화가 일어난다. 조광조등 개혁 사림파들은 심정,남곤 등 훈구파들에 의해 화를 입는다. 이에 송순은 크게 낙담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상을 비판하는 다음 시를 지었다. 날은 저물고 달은 아직 돋지 않아 뭇 볕이 다투어 반짝이는 저 하늘 산천의 기운은 가라앉아 가네. 그 누가 알랴, 이 속에서 홀로 아파하는 이 마음을 이 시는 사림파의 개혁이 물거품이 되고 생기가 가라앉은 현실을 아파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그런데 훈구파들은 이 시에 중상(中傷)의 뜻이 있다는 시비를 하여 송순은 자칫하면 화를 당할 뻔하였다 한다. 한편 평소에 김안로의 전횡을 간언한 송순은 김안로가 권세를 잡자 41세(1533년)에 고향인 담양으로 낙향한다. 그리고 면앙정을 짓고서 시나 읊으면서 자연을 벗 삼아 4년간을 지낸다. 어쩌면 송순은 타고난 벼슬 운이 있었나 보다. 1537년에 김안로가 사사된 후 5일 만에 그는 홍문관 부응교에 제수되고, 다시 사헌부 집의에 오른다. 이어 홍문관 부제학, 충청도 어사 등을 지냈고, 그 뒤 경상도 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등의 요직을 거쳐 50세 되던 해인 1542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는 등 승승장구 한다. 1545년. 명종 원년에 을사사화(1545년)가 일어난다. 대윤 윤임 일파는 소윤 윤원형 일파에 의해 숙청당하고 많은 사림들이 희생을 당한다. 이 때 그는 유명한 상춘가(傷春歌)를 짓는다.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허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와 무삼 하리오. 이 시는 을사사화로 인하여 화를 당한 사림들을 봄 날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 비유하여 세상을 개탄하는 노래이다. 마치 암울했던 70년대 80년대를 우의하여 사람들에게 불러지다가 금지된 대중가요처럼. 여기에서 꽃은 사화로 희생된 현인 사림들이고, 바람은 간신배들을 말하며, ‘희짓는(심술부리는) 봄’은 어수선한 세태를 말한다. 꽃(현인 사림들)이 진다고(희생당한다고) 하여 새들아 슬퍼마라. 바람(간신배들)때문에 낙화하니 꽃의 탓 아니로다. 지나가노라고 심술부리는 봄(시대의 세태)을 시기(탓)하여 무엇하리. 그런데 이 노래로 인하여 송순은 화를 입을 뻔하였다. 이 노래가 입소문이 나서 어느 기생이 잔치 집에서 불렀다. 이 잔치에는 당시 세도가인 소윤 윤원형 일파의 한 사람인 진복창도 참석하였다. 이 노래를 들은 진복창은 불온 노래라고 말하면서 기생에게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추궁하였다. 다행히도 그 기생이 끝내 묵묵부답하여 송순은 화를 면하였다 한다. 한편 송순은 명종3년(1547년) 그의 나이 55세에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 라는 시를 짓는다. 풍상이 섞어 친 날에 갓피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이(桃李)야 꽃인 채 마라 임의 뜻을 알괘라. 어느 날 하루 명종임금은 궁중에 핀 황국화를 꺽어 옥당관에게 주면서 노래를 바치라고 하였다. 옥당의 관리들은 갑작스런 일이라 당황해 하였다. 이 날 숙직인 송순이 이 말을 듣고 시 한 수를 옥당관에게 지어 올렸다. 명종 임금은 이 시를 보고 감탄하여 누가 지었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송순은 임금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이 시는 바람과 서리가 섞어 치는 그 시대 상황에서 황국화와 복숭아나 자두 꽃을 은유적으로 대조하면서 풍상에도 늦가을 까지 피는 황국화야 말로 충절과 지조 있는 선비임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가 “송강집”에 수록되어 송강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이렇듯 암울한 시대를 풍자한 시를 여러 편 쓴 송순은 1550년에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과 이기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 : 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그해 6월에 충청도 서천, 평안도 순천, 수원 등으로 귀양을 갔다. 그리고 1년 반 후에 귀양에서 풀려나 1552년 3월에 선산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담양부사 오겸의 도움을 받아 면앙정을 중건하였다. 이 70세에 기로소(耆老所 : 조선시대에,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고, 1569년에 한성부판윤과 의정부 우참찬이 된 뒤, 벼슬을 사양하여 관직생활 50년 만에 은퇴하였다.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교우로는 신광한, 성수침, 나세찬, 이황, 박우, 정만종, 송세형, 김윤제, 임억령 등이 있고, 문하인사로는 김인후, 임형수, 노진, 박순, 기대승, 고경명, 정철, 임제 등이 있다. 한편 안내판 바로 옆에는 가사문학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면앙정가>의 한 구절을 새긴 비가 서 있다. 이 비는 나중에 자세히 보기로 하고 그 옆의 <면앙정중수기적비>를 본다. 1989년에 세워진 이 비에는 면앙정이 1533년에 세워진 이후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이 되었고, 그 후 1654년에 후손들의 힘으로 다시 중건 된 후 오늘에 이르러 퇴락하였는데 1979년과 1989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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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07.07.10
10691
제5장 송강은 지금도 흐르는 데 - 송강정에서 (10)
송강은 지금도 흐르는 데 - 송강정에서 (10) -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에 대한 후세의 평가 그러면 여기에서 송강이후 후세 사람들이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어떻게 평가하였는지를 살펴보자. 이 두 미인곡에 대한 평가를 한 사람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 <구운몽>의 작가 서포 김만중, <순오지>의 저자 홍만종, 서포의 손자 북헌 김춘택, 그리고 김상숙, 이덕무 등이다. 그 중에도 서포(西浦) 김만중(1637-1692)의 평가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우리나라의 훌륭한 문장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세 편뿐’이라고 극찬하면서 이 가사들을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비겨 동방의 이소' 라고 하였다. 김만중이 <서포만필>에서 쓴 송강가사의 평을 좀 더 자세히 보자. 송강의 <관동별곡> <전. 후 미인가>는 우리나라의 <이소> (초나라 굴원이 지은 부의 이름. 굴원이 조정에서 쫓겨나 임금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읊은 대서사시 :필자 주)이나 그것은 한자로써는 쓸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악인(樂人)들이 구전하여 서로 이어받아 전해지고 혹은 한글로 써서 전해질 뿐이다. 어떤 이가 칠언시로써 <관동별곡>을 번역하였지만 아름답게 될 수 없었다. 그것은 택당(澤堂)이 젊어서 지은 작품이라 하지만 옳지 않다. 구마라습(인도의 학승으로 대승불교에 능통하여 전진의 왕 부견에게 중국으로 끌려와 법화경 중론등 많은 불경을 번역함 : 필자 주)이 말하기를, “천축인의 풍속은 문채(文彩)를 가장 숭상하여 그들의 찬불사는 극히 아름답다. 이제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단지 그 뜻을 알 수 있을 뿐이지, 그 말씨는 알 수 없다.” 하였다. 분명 이치가 그럴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입으로 표현된 것에 가락을 붙인 것이 시가문부(詩歌文賦)이다. 사방의 말이 비록 같지는 않더라도 진실로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각각 그 말에 따라 가락을 맞춘다면, 똑같이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을 통할 수 있는 것이지 유독 중국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자기 말을 버려두고 다른 나라말을 배워서 표현한 것이니 설사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여염집 골목길에서 나무꾼이나 물 긷는 아낙네들이 에야디야 하며 서로 주고받는 노래가 비록 저속하다 해도 그 진가를 따진다면 결코 학사 대부들의 이룬바 시부라고 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논할 수는 없다. 하물며 이 삼별곡(三別曲)은 천기의 자발함이 있고 이속의 비리함도 없으니 예부터 좌해의 진문장은 이 세 편뿐이다. 그러나 세편을 가지고 논한다면 <후미인곡>이 가장 좋고 오히려 <관동별곡>과 <전미인곡>은 한자어를 빌어서 수식했다.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동방의 이소’라고 한 서포의 이 평은 후세에 우리나라의 글과 문학의 고유성과 독창성을 말할 때에 가장 많이 인용하는 대목이다. 이런 민족 문학의 고유성에 송강의 <속미인곡>이 가장 대표 작품으로 인용된다는 것은 송강 본인의 영광이기도 할 뿐 아니라, 이 작품이 나온 담양 송강정 역시 영광이다. 좀 크게 말하면 담양 성산 가단의 기쁨이요. 더 크게 말하면 남도 시가 문학의 광영이다. 한편 홍만종(1643-1725)은 <순오지(旬五志)>에서 사미인곡은 송강이 지은 가사로서 ‘시경(시경)의 미인(美人) 두 글자를 본받아 써서 시대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모하는 뜻을 부친 것으로 역시 중국 초나라시대의 백설곡(白雪曲)과 맞잡이다.’ 라고 하였고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에서 다하지 못한 뜻을 말한 것인데, 표현이 더욱 좋아지고, 뜻이 더욱 간절해졌는데,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출사표(出師表)'와 백중(伯仲)할 만한 작품이라.’고 하였다. (순오지는 홍만종이 지은 수상록이다. 정철, 송순의 시가와 중국의 서유기에 대하여 평론하고, 부록으로 130여종의 속담을 실어 놓았다. 한강에서 병으로 누워 있을 때 꼭 15일 만에 완성했기 때문에 '순오지‘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홍만종 자신이 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우리말을 사용한 가사는 우리 곡조를 취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두나 언문, 즉 우리말의 사용을 주장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천주학을 소개한 이수광(1563-1628) 또한 그의 <지봉유설>에서 정철의 가사를 칭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가사는 우리말을 섞은 까닭에 중국의 악부와 더불어 견줄 수가 없다. 근세에 송순과 정철이 지은 것이 가장 훌륭하다. 그러나 입으로 회자되고 마는 데 지나지 않았으니 애석하다. ..... 근세에 퇴계가, 남명가와 송순의 면앙정가, 백광홍의 관서별곡,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사미인곡, 장진주사가 세상에 널리 전해진다. (후략) - 지봉유설 권 13 김춘택(1670-1717)의 송강가사의 평 또한 칭찬일색이다. 송강의 전후미인가는 원래 국문으로 지은 것인데 그가 추방당한 울분에서부터 군신간의 이별을 남녀간의 애정관계에 비유하여 묘사하였다. 그 마음이 충성스럽고 그 뜻이 고결하며 그 지조가 곧고 우아 곡진하고 그 격조는 비분하면서도 곧아서 굴원의 <이소>와 견줄만하다. 우리 서포할아버지께서는 일찍이 이 두 가사를 손수 베껴 그 제목을 ‘언소’라고 하였다. 송강의 가사가 지닌 광채는 해와 달에 비길만하다. 한편 <홍길동전>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균 (1569 선조2 -1612 광해군 4)의 송강 정철의 글에 대한 평을 보자. 정송강은 속구(俗句)를 잘 지었다. 그의 사미인곡과 권주가는 다 맑고 정중하여 들을 만하다. 비록 이단자가 이를 배척하여 사(邪)라 하지만 문채(文采)와 풍류는 가릴 수가 없어 그의 작품을 아끼는 자가 많다. 여기에서 속구란 우리말로 된 글을 말한다. 허균이 속구를 강조한 것은 그는 개성적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상의 언어, 즉 서민들이 쓰고 있는 일상어로 글을 쓰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중국의 글을 모방하여 글을 짓는 모화적 풍습을 비판한 것이다. 이런 글쓰기의 자주성이 앞에서 본 서포 김만중의 서포만필에 이어지고 있다 하겠다. 상촌 신흠(1566-1628)의 평 또한 찬사일색이다. 옛사람의 시는 사상 감정의 발로라고 하였는데 진시로 옳음 말이다. 그런데 정철의 시는 맑고 고상하며 특히 가사는 아름답고도 뜻이 깊다. 시조는 그지없이 고매하여 마치 무지개 같이 영롱하며 구슬같이 아름답다. 이어서 김상숙(1717-1792)은 <사미인첩> 발문에서 ‘대개 임금이나 남편의 은총을 받고서 그 임금 그 남편을 사랑하는 것은 보통 사람이면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임금이나 남편의 은총을 잃고서도 그 임 , 그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은 반드시 정신(貞臣) 열부(烈婦)라야만 할 수 있다.’ 라고 하여 정철의 작품을 우시연군지사 (憂時戀君之詞)로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들을 종합하여 보면 전후미인곡은 순수한 우리말로 지어진 가사라는 점, 여인의 애절한 임을 향한 노래를 빌어 임금에게 충절을 다한 연군가라는 점, 임을 위한 사모곡으로서 서민들이 널리 부르는 노래라는 점에서 크게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조선의 사대부들 간에는 한글이 천시가 되었던 시절에 송강은 일상적 우리말로 독수공방하는 여인이 임에게 보내는 사모곡을 지었으니 그냥 기록 속이나 책 속에서 느끼는 시가 아닌, 유행가인 사미인곡 속미인곡은 널리 사람들에게 불리었으리라. 나는 이제 송강 정철이 지금도 가사문학의 제1인자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후세 사람들의 송강가사 애창 그러면 여기에서 후세 사람들이 얼마나 송강의 가사를 애창하였는지를 알아보자. 전후미인곡은 정말로 사람들이 널리 애창하였나 보다. 나루터의 아낙네도 부르고, 술집에서 기생들도 불렀나 보다. 그 정황을 알 수 있는 글이 이덕무의 글이고 이안눌의 시이다. 먼저 책에 미친 사람 이덕무(1741 영조17-1793 정조 17)의 글을 보자. (이덕무는 서자출신으로서 규장각에서 도서편찬 사업에 적극 참여한 북학파 실학자이다. 그는 박지원과도 교유하였고, 유득공 박제가와 함께 지은 ‘건연집’이라는 시집은 중국에 까지 널리 알려졌다.) 동악 이안눌은 어떤 사람이 송강의 사미인곡 부르는 것을 듣고 이렇게 읊었다. 강변에서 그 누가 미인곡을 부르는고. 외로운 뱃머리에 달빛이 희미한데 님 그려 애 끓는 정은 오직 아낙네들만이 아는가 江頭誰唱美人詞 正是孤舟月落時 惆悵戀君無限意 世間唯有女嫏知 송강은 불행한 처지에서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는 지극한 뜻을 국문시가로 노래했는데, 거기에는 이소와 같은 충성과 의분이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송강의 가사와 시조는 지금도 자주불리고 있다. 이 글에서 이덕무가 인용한 이안눌의 시는 <송강의 가사를 듣고[聽松江歌詞]>이다. 뱃머리의 아낙네가 부르는 이 미인곡은 그 내역을 알 필요도 없이 임 그리는 노래, 임을 죽도록 사모하는 한 많은 여인의 노래이다. 한편 동악 이안눌(1571 선조4-1637 인조15)은 기생이 부르는 미인곡을 듣고 7언시를 짓는다. 담양부사를 하기도 한 그는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고 두보의 시를 만독이나 한 시인으로 당시에 권필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 시인이다. 기생 옥아가 부르는 인성부원군 정상공의 사미인곡을 듣고 십년동안 상강 포구에서 향풀이나 뜯으며 맥없이 요대의 이별을 원망하네. 계집애들은 그때 일 알지도 못하고 지금 헛되이 미인사만 부르는구나. 칠아는 이미 늙고 석아는 죽어 오늘 날의 명창은 옥아 뿐이네 대청마루에서 미인사를 불러 보는데 들어보니 인간세상 노래가 아닌 듯하네. 한 기생이 노래의 내역을 알지도 못하고 슬프게 미인사를 부른다. 기생 중에 명창인 석아는 이미 죽고 칠아는 나이가 많아 목소리가 안 나와서 오늘날의 명창은 옥아뿐이다. 옥아는 대청마루에서 사미인곡을 부른다. 이 노래를 들어보니 정말로 구슬프고 애련하여 이 세상 노래가 아닌 것 같다. 지금까지 나는 너무 한참 동안이나 송강정 뒤뜰의 사미인곡 비 앞에 있었다. 이제 송강정을 내려온다. 내려 올 때는 올라갔을 때와 다른 길이다. 돌계단 길이 아닌, 시누대가 심어져 있는 흙길로 내려온다. 가냘픈 시누대는 바람에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고 흥청흥청 거리면서도 세파를 무던히도 잘 견디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박종화의 소설 ‘자고 가는 저 구름아‘에서 송강이 강계에 유배 중 일 때 기녀 강아가 ’사미인곡‘을 부르고 송강이 ’속미인곡‘을 부르는 대목을 떠올렸다. 자, 이제는 면앙정으로 발길을 옮기자. <성산별곡>의 모태가 된 <면앙정가>을 지은 송순을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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