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담양

삼한시대

담양군에 최초로 주민들이 거주한 흔적이 발견된 것은 현재의 봉산면 제월리에서 석기류가 출토된 흔적이 있었고, 주변마을에서 지석묘들이 발견되고 있어 석기문화인들이 주위환경을 이용하여 농경과 수렵을 위주로 공동 취락지를 형성하며 살았다고 추정된다. 또한, 화순 등 인근지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고 청동기 문화에 뒤이어 철제도구와 옹관묘가 매장되어 있어 청동기 및 철제의 존재를 알고 있거나 그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보아지며 조선왕조 영조 34년(1758년) 추성지에는 지금의 무정면 봉안리 일대가 삼한시대에 술지현(述只縣)의 자리하고 전하고 있다.

백제시대

백제때는 추자혜군이라 이름하였으며 창평은 전라남도 동북쪽에 위치하여 굴지현(屈支縣)에 속하였다. 당시 백제내의 군(郡)은 27개였고 성(城)은 200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담양도 27개군중 하나이고 금성산성과 담주산성도 200개성중의 하나인 듯하다. 추성지에 의하면 금성산성은 삼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신라시대에 이르러 경덕왕 16년(서기 757년)에 추성군으로 개칭하였으며 백제때 율지현(栗支縣)이 율원현(栗原縣)으로 다시 개칭되어 추성군의 영현(領縣)이 되었으며, 창평은 신라 경덕왕때 기양현(祈陽縣)으로 고쳐서 무주(현 광주)의 영현(領縣)에 속하였다.

고 려

고려 성종14년(서기 995년) 추성군을 담주라 개칭하고 도단련사를 두었으며 현종 9년(서기 1018년) 담주 도단련사를 없애고 담양군이라 개칭됨과 동시에 율원현 및 창평현과 함께 무주(현 광주)에서 나주로 소속되었다. 명종2년(서기 1172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고, 공양왕 3년(서기 1391년)에는 원율현(原栗縣 : 현 금성면 원율리)을 편입하였다.

조 선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국사 조구의 고향이라 하여 태조 4년(서기 1395년)에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태종 13년(서기 1413년)에는 담주에서 담양으로 개칭되어 도호부가 되었으며, 고종32년(서기 1895년) 전국을 23부(府) 331군(郡)으로 나누었을 때 남원부(南原府)관할로 되었다가 대한제국 광무 9년(서기 1905년)에 담양부를 담양군으로 고치고 순종 2년(서기 1908년)에 폐지된 옥과군 일부가 담양군에 합하여졌다.

일 제

일제시대인 서기 1914년에는 폐지된 창평군의 일부면을 합하여 13面이 되었는데 1918년에는 무면(武面)과 정면(貞面)을 무정면으로 구암면을 봉산면으로 개칭하여 12개면이 되었으며, 서기 1943년 담양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오늘의 1읍11면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정부수립이후

1961년 10월1일자로 담양군 동리 명칭과 구역에 관한 조례(제2호), 담양군 이장정수조례(제3호)를 각각 제정공포하여 1읍11면 139리를 관할 하였으며, 1973년도에 담양호 건설로 용면 산성리와 청흥리가 수몰됨 으로서 2개리가 줄어 137개의 법정리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998. 6. 30 현재 현재 1읍11면 137리 294운영마을을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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