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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21
12247
고하 송진우 (古下 宋鎭禹, 1890∼1945)
고하 송진우 (古下 宋鎭禹, 1890∼1945) 전라남도 담양(潭陽) 사람이다. 1906년 창평(昌平)의 영학숙(英學塾)에서 김성수(金性洙)와 함께 수학하고, 1908년 김성수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15년에 명치(明治)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유학기간중에 유학생친목회(留學生親睦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했으며 「학지광(學之光)」을 편집하였다. 1915년에 김성수를 도와 당시 경영난에 빠져 있던 중앙학교(中央학교)를 인수하여 학감(學監)이 되었다가 김성수의 뒤를 이어 1918년 3월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송진우의 관리 아래 중앙학교의 교육은 민족교육을 관철했으며 수많은 애국적 청소년들을 배출하였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宋繼白)이 2·8독립선언 준비차 귀국하여 송진우를 만난 것을 계기로 하여 송진우·현상윤(玄相允)·최 린(崔麟)·최남선(崔南善) 등이 빈번히 회합을 열고 초기의 3·1운동을 기획하기 시작했으며 송진우는 천도교측과 기독교측의 연합을 주선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후 이 운동을 초기에 기획한 48인의 하나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서대문감옥에 구금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겪었다.1921년 9월 14일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주식회사 동아일보」로 개편되자 제3대 사장에 취임하였다.1922년 11월 이상재(李商在)를 대표로 하고 지도급 인사 47명이 조선민립대학 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발기할 때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이 사업을 적극 추진했으며, 동아일보를 통하여 민립대학설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1923년 3월 29일 각계 대표 400명이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모여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여 전국적으로 1천만원의 기금을 모집하여 재단을 구성하고 민립종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의한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1924년 4월 친일파 박춘금(朴春琴)의 권총협박사건으로 동아일보 사장을 사임하고, 1924년 동아일보사 고문, 1925년에는 동아일보 주필(主筆)로 취임하여 언론활동을 하였다.1925년 7월 미국 하와이에서 태평양연안 기독교청년회 주최로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가 개최되자 미국으로부터 참석한 서재필(徐載弼)과 함께 국내대표로 암석하여 활동하였다.1925년 9월 일제 총독부가 「개벽(開闢)」잡지를 발행정지 시키자 한기악(韓基岳)·민태원(閔泰瑗) 등과 함께 일제의 언론탄압을 비판하고 교섭하여 발행정지의 해제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신천지(新天地)」와 「신생활(新生活)」의 필화사건이 일어나자 박승빈(朴勝彬) 등과 함께 언론자유의 옹호를 위하여 노력하였다.1925년 11월에 함경남도 함흥경찰서가 시대일보(時代日報) 지방부장 홍남표를 불법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안재홍(安在鴻)·이종린(李鍾麟) 등과 함께 무명회(無名會)의 교섭위원으로서 그의 석방을 위하여 투쟁하였다.1926년 3월에 국제농민회 본부로부터 조선농민에게 전하는 글을 동아일보 3월 5일자에 게재했다가 동아일보가 제2차 무기정간을 당함과 동시에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그와 편집 겸 발행인 김철중(金鐵中)이 일제 검찰에 구속 기소되어 1926년 3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그는 징역 6월형, 김철중은 징역 4월형의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1927년 10월 제6대 동아일보사장에 취임했으나,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가 손기정선수의 우승사진을 게재하면서 손선수의 앞가슴에 붙인 일장기(日章旗)를 지우고 실은 「일장기 말소사건」이 문제가 되자 동아일보는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그도 사장을 사임하였다.1945년 8·15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조직하여 수석총무로서 활동하다가 한현우(韓賢宇)에게 암살당하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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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21
11227
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 1510∼1560)
하서 김인후 (河西 金麟厚, 1510∼1560)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의릉참봉 김령(金齡)의 아들로 장성 맥동 출생이다. 10세 때 호남관찰사로 내려왔던 김안국을 찾아가 『소학』을 배웠다고 하며 이어 송순에게도 학문을 배웠다. 18세인 1527년 화순에 귀양와 있던 신재 최산두를 찾아가 수학하였다. 이 무렵 사서·오경 뿐만 아니라 제자백가까지 섭렵하였으며 천문지리, 음양산수(陰陽算數), 율려척도(律呂尺度) 등에도 두루 통달하였다.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533년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이황과 교유하였다. 1540년 문과에 합격하고 이듬해 김안국의 천거로 호당에서 사가독서하였다. 1543년 홍문관박사 및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며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으며 이어 홍문관 부수찬에 올라 기묘사화 피화자의 신원을 청하기도 하였다. 1545년 인종이 죽자 사직하고 귀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에 전념하였다. 1556년 서경덕의 학문이 하학(下學)을 소홀히 하고 돈오(頓悟)로 이끌 우려가 있다고 비판하였으며 1557년 「주역관상도(周易觀象圖)」와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를 저술하여 성리설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켰다. 1558년 퇴계 이황과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관해 토론하던 고봉 기대승이 와서 의견을 구하니 태극과 음양을 일물로 보는 이항의 설에 반대하는 기대승의 입장이 옳다고 대답하였다. 또한 나정암(羅整庵)의 견해에 따르는 노수신(盧守愼)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비판하는 글을 써 뒤에 이황과 기대승이 노수신의 설을 반박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등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 이론화 과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소학과 효경을 학문의 시작으로 강조하였으며 예학에도 조예가 깊어 주자가례를 학문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예서인 가례고오(家禮考誤)를 저술하였다. 문인으로는 정철, 기효간, 변성온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 등이 있다. 장성 필암서원(筆巖書院)과 곡성 영귀서원(詠歸書院)에 배향, 1796년에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면앙정삼십영」(1552년), 「소쇄원사삽팔영」을 지었다. 양자징(소쇄옹 양산보 아들), 유경렴(미암 유희춘 아들), 일재 이항의 아들을 사위로 맞았고 조희문의 장인이다. 문집으로 『하서집(河西集)』이 전한다.※ 관련 문화유적 : 소쇄원, 면앙정, 가사문학관내 하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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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21
11408
서하당 김성원 (棲霞堂 金成遠, 1525∼1597)
서하당 김성원 (棲霞堂 金成遠, 1525∼1597)자는 강숙(剛叔)이며 호는 서하당(棲霞堂) 또는 인재(忍齋)이다. 광주의 충효리(옛 석저촌)에서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낸 아버지 김홍익(金弘翼)과 어머니 해주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송강 정철의 처외재당숙(妻外再堂叔)이다. 6세가 되던 중종 26년(1531) 아버지를 여의었고, 인종 원년(1545) 서산유씨(瑞山柳氏, 柳泗의 딸)와 결혼하였다. 장인인 유사와 하서 김인후에게 학문을 배우기도 하였다. 32세 때(명종 12년)는 당시 담양 부사로 있던 석천 임억령을 만나 학문을 배웠고 망년지교(忘年之交)를 하였다고 한다. 33세에는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성산의 서하당과 식영정을 배경으로 더욱 자연과 서적에 침잠하였으며, 여러 문인들과도 활발히 교유하였다. 김인후와 임억령을 스승으로 모시는 한편 고봉 기대승·제봉 고경명·송강 정철 등과 도의의 사귐을 두터이 하였는데, 특히 임억령·고경명·정철과는 성산(星山)의 사선으로 만났다고 한다. 따라서 이 때부터 서하당과 식영정을 배경으로 한 여러 문인들의 시작 활동이 이어지게 되며,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의 가관(假官)이 되어 의병 활동에 나섰으며, 뒤이은 정유재란 때에 무등산을 거쳐 동복의 모후산으로 피신하던 중 왜적에 의해 고령의 노모와 함께 7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저서로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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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21
10111
석헌 류옥 (石軒 柳沃, 1487∼1519)
석헌 류옥 (石軒 柳沃, 1487∼1519)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계언(啓彦), 호는 석헌(石軒), 시호는 정간(靖簡)으로 본관은 문화이다. 창평면 해곡리 집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2호(지정명칭 류종헌 가옥, 일명 와송당)로 지정되어 있으며, 송강 정철의 신방으로 사용되었다. 1501년 생원이 되고, 1507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509년 홍문관 수찬을 거쳐 이듬해 무안현감이 되었다. 이때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 등과 연명으로 단경왕후(端敬王后, 중종비) 신씨의 복위를 청하고, 아울러 신씨를 폐위시켰던 훈신들의 죄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가 죽자 빈(嬪) 박씨가 정비가 되는 것을 반대하다가 유배당하였다. 1515년 사헌부장령, 1517년 함경도평사를 거쳐 이듬해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 이때 경연(經筵)에서 한전균전제(限田均田制)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1518년 남곤(南袞)의 미움을 받아 종성부사로 전출되었다. 1805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석헌집>이 있다.※ 관련 문화유적 : 류종헌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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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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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 임억령 (石川 林億齡, 1496∼1568)
석천 임억령 (石川 林億齡, 1496∼1568)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대수(大樹)이며 호는 석천(石川), 본관은 선산(善山)으로 해남출신이다. 임수(秀)의 손자이자 임우형(遇亨)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딸이다. 눌재 박상에게 글을 배웠고 1516년에 진사시, 1525년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부교리·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간·전한·세자시강원 설서 등을 지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금산군수로 있었는데 동생 임백령(百齡)이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의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자책을 느끼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그 뒤 임백령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을 보내오자 분격하여 이를 불태우고 해남에 은거하였다. 뒤에 1552년 동부승지, 병조참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77년 62세에 담양부사가 되었다.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하며, 시문을 좋아하여 사장(詞章)에 탁월하였다. 성산(식영정)시단을 열어서 김성원, 정철, 고경명 등의 제자들과 수창했는데 성산동 관련 한시문은 500여 편으로 그 작품성이 뛰어난다. 남면 지곡리 별뫼에 있는 식영정(息影亭)은 1560년 그의 사위인 서하당 김성원이 짓고 석천에게 증여한 정자로 식영정이 있는 별뫼를 무대로 많은 작품을 남겨 송강 정철, 서하당 김성원, 제봉 고경명과 함께 '식영정 사선(四仙)' 이라 불리루고 있다. 작품으로 「면앙정삼십영」(1552년), 「식영정 20영」, 「서하당 8영」, 「식영정기」 등을 남겼다. 고맹영과 김성원 등을 사위로 맞았다. 동복 도원서원(道源書院), 해남 석천사, 창평 성산사(星山祠, 1795년, 정조 19년 건립)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석천집(石川集)』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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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21
10063
명곡 오희도 (明谷 吳希道, 1581∼1623)
명곡 오희도 (明谷 吳希道, 1581∼1623)자는 득원(得原), 호는 명곡, 이름은 희도이다.6세에 서당에 입학하여 하루에 수백자씩을 외웠으며 소학을 배워 세상을 살아가는 도리와 예의 범절을 밝게 알았고 16세에는 도사(都事) 김복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9세인 1601년(선조34)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1602년 부친상을 당하여 몸이 쇠약하였으나 3년 동안 시묘를 지성으로 거행하여 주민 모두가 감탄하였다. 1614년(광해군6)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창평에 은거하면서 학문에 정진하여 명성이 높았다. 인조가 등극하기 전 창평에 들려 선생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고자 하였으나 노모 때문에 떠날 수가 없다고 거절하고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1623년(인조21)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상대기주(常代記注)가 되었으며 선생은 임금 앞에서 민첩하게 문장을 초록하여 한가지도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동료와 임금의 칭송을 듣고 곧 검열을 제수 받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천연두에 걸려 41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저서로는 『명곡유고(明谷遺稿)』가 남아있다. 인조가 재임 중 창평(현 고서면 후산리)에 은거하고 있는 선생을 찾아 왔을 때 말을 매었다는 키가 30m에 달하는 은행나무(전라남도 기념물 제45호)가 있다. 또한 명곡의 넷째아들 오이정이 명옥헌(鳴玉軒, 전라남도 기념물 제44호)을 짓고 연못을 만들고 백일홍(현재 수령 300∼400년)을 심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뛰어난 경관과 역사의 숨결을 좇는 문화 탐방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명옥헌은 매년 7월부터 8월 초순사이에 찾으면 흐드러지게 핀 백일홍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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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21
12357
소쇄공 양산보 (瀟灑公 梁山甫, 1503∼1557)
소쇄공 양산보 (瀟灑公 梁山甫, 1503∼1557)조선 중기의 유학자. 자는 언진(彦鎭). 호는 소쇄(瀟灑), 본관은 제주. 창암(蒼巖) 양사원(梁泗源)의 세 아들 가운데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부친의 호가 창암이라 하여 소쇄원이 있는 마을을 창암촌이라 하였다.어릴 때 정암 조광조(1482∼151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양산보가 15세 되던 해 서울의 조광조에게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그 문하에 들게 하였던 것이다. 이때 성수침, 성수종 형제와 같이 입학하여, 이들과 친하게 지냈다.17세인 1519년에 시행한 현량과(賢良科)에 응시하여 급제하였으나 합격자의 수가 많고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대신들이 관직을 주지 말 것을 요청하여 벼슬은 받지 못했다. 이해 일어난 기묘사화로 인해 스승인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되자 그를 따라 향리로 돌아왔다. 그해 12월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큰 충격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에 숨어 살기를 결심하고 창암촌의 산기슭 계곡에 소쇄원을 꾸미게 되었다. 소쇄원의 '소쇄(瀟灑)라는 말은 원래 공덕장(孔德璋)이 쓴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 '상쾌하고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25세 때 부인 광산김씨와 사별한 이후 소쇄원을 지키다 1557년 3월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장남 자홍(子洪)은 일찍 죽고 2남 자징은 호가 고암인데 현감 벼슬을 하였고 하서 김인후의 사위이다. 뒤에 우암 송시열이 고암의 행장(行狀)을 썼으며, 「소쇄원도」에는 광풍각 옆에 고암정사가 건립되어 있다. 3남인 자정(子渟)은 교도(敎導) 벼슬을 하였다.양산보의 작품으로는 『효부(孝賻)』와 『애일가(愛日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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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21
11490
녹천 고광순 (鹿川 高光洵, 1848∼1907)
녹천 고광순 (鹿川 高光洵, 1848∼1907)고광순은 헌종 14년(1848) 전남 담양군 창평면(昌平面) 유천리(柳川里)에서 장흥 고씨(長興高氏)의 명문 후예이며, 임진왜란 때 충청도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순국한 고경명(高敬命) 고인후(高因厚) 부자의 혈손(血孫)으로 태어났다.고광순과 함께 의진에 참여한 문중 인물은 고제량(高濟亮)과 고광훈(高光薰) 고광수(高光秀) 고광채(高光彩) 등이 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라도 지방에서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녹천(鹿川) 고광순·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 등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나라의 원수를 갚고 일제를 몰아내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고광순이 참여한 광주의진에서는 대장 기우만이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함께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광주에 결집된 호남의병은 관군의 탄압과 회유로 인해 와해되고 말았다. 1906년 4월 최익현(崔益鉉)이 순창(淳昌)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고제량(高濟亮)과 함께 여기에 참여하기 위해 달려갔으나 최익현은 체포되고 의진이 해산된 뒤였다. 고광순은 고제량과 함께 기우만 백낙구(白樂九)를 찾아가 함께 거사하여 순천을 공략하기로 하였으나 기우만 백낙구가 체포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광순은 좌절하지 않고 동지 규합에 힘썼다. 이후 담양 창평으로 돌아온 고광순은 의병 재기에 힘을 쏟아 1907년 1월 24일 고제량 등의 지사들과 함께 장정 5백여 명을 모아 담양군 창평면 저산(猪山)의 전주 이씨 제각에서 다음과 같이 의진을 결성하였다. 의병장 고광순 부장(副將) 고제량 선봉장 고광수 좌익장 고광훈 우익장 고광채 참 모 박기덕(朴基德) 호군(護軍) 윤영기(尹永淇) 종사(從事) 신덕균(申德均) 조동규(曺東奎) 이때 남원(南原)의 양한규(梁漢奎) 의병장으로부터 연합작전의 연락을 받고 즉시 남원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그가 남원에 도착하였을 때는 양한규 본진이 이미 와해된 뒤였다. 4월 25일 다시 대열을 정돈하고 병력을 증강하던 중 능주(綾州, 지금의 화순군 능주면) 사림들의 협력을 얻어서 윤영기(尹永淇) 등과 함께 화순읍으로 진격하여 점령하고, 일본군에 협력하는 자들의 가옥을 모두 불태워 관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26일 다시 동복(同福, 지금의 화순군 동복면)으로 진군하였는데 광주에서 파견된 관군들과 도마치(圖馬峙)전투에서 패배하고 군사는 일시 흩어졌다. 이 무렵 고광순은 장기전에 대비해 휘하 의병을 거느리고 1907년 9월 17일 화개동(花開洞)을 지나 지리산 피아골 계곡 아래에 자리잡은 연곡사(燕谷寺)로 들어가 유진(留陣)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고광순은 연곡사를 의진 본영으로 삼고 "불원복(不遠復)" 세 자를 쓴 태극기를 군영 앞에 세우고 장기항전의 채비를 갖추어 나갔다. 머지 않아 국권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강렬한 신념이 이 태극기에 투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리산이 의병활동의 중심지로 변모해 가자 일제는 즉시 대탄압작전에 돌입하여 진해, 광주, 진주경찰서에서 출동한 군경을 지리산에 집결시켜 1907년 10월 16일 새벽 연곡사를 포위한 채 공격을 개시하였다. 고광순은 총력을 다해 고군분투하였으나 일제의 막강한 전력에 2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관련문화유적 : 포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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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21
11441
제봉 고경명 (霽峰 高敬命, 1533∼1592)
제봉 고경명 (霽峰 高敬命, 1533∼1592)조선 중기의 문관이자 의병장이다.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峯)·태헌(笞軒)이며, 시호는 충렬(忠烈), 본관은 장흥이다. 대사간 고맹영(高孟英)의 아들이다. 1558년 문과에서도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 이어 형조좌랑, 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1560년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 하였다. 이후 지제교에 뽑혔으며 1562년 별시 때는 고관(考官)이 되어 정철을 장원으로 뽑았다. 1563년 이량(李樑)이 실각할 때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19년 동안 학문을 공부하고 산수를 유람하면서 보냈다. 1581년 영암군수에 다시 기용되고 종계변무(宗系辯誣)를 위한 사절로 김계휘(金繼輝) 등과 중국에 다녀왔다. 이어 한성부 서윤, 한산군수, 성균관사예, 순창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591년 동래부사로 재직하다 정철이 건저의(建儲議)사건으로 실각하면서 함께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추성관에서 창의하여 7천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북상하였으며 금산에 모인 적을 공격하다 교전 중에 순절하였다. 차남 고인후(高因厚)도 같이 죽었으며 장남인 고종후(高從厚)는 1593년 진주성싸움에서 죽고 차녀도 정유재란 때 절개를 굽히지 않고 자결하였다. 기대승, 정철, 이이 등과 교유하였다. 삼교(三敎)·구류(九流)의 서적을 두루 연구하고 상수학(象數學)에 더욱 밝았으며, 문장 특히 시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제봉집(霽峰集)』(가사문학관 전시)이 있다. 「면앙정삼십영」(1552년), 「식영정이십영」, 무등산 기행을 담은 『유서석록(遊瑞石錄)』을 남겼다.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 광주 포충사(褒忠祠), 금산 성곡서원(星谷書院),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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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21
11661
미암 유희춘 (眉巖 柳希春, 1513∼1577)
미암 유희춘 (眉巖 柳希春, 1513∼157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시호는 문절(文節)이며,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했던 금남 최부(1425∼1504)의 외손이다. 모재 김안국과 신재 최산두의 문인이다. 1538년 사가독서하였으며, 그 뒤 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46년 을사사화때 김광준(金光準)과 임백령(林百齡)이 윤임(尹任)일파 제거에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함경도 종성에 안치되었다. 그곳에서 19년간을 보내면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때 국경지방의 풍속에 글을 아는 사람이 적었는데, 그가 교육을 베풀어 글을 배우는 선비가 많아졌다. 1565년 충청도 은진에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3정승의 상소로 석방되었다. 직강, 응교, 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지제교를 겸임하였다. 이어 장령, 집의, 사인, 전한, 대사성, 부제학,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75년 예조·공조의 참판을 거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하여 낙향하였다. 경전에 널리 통하였고, 제자(諸子)와 역사에도 능하였다. 시강원설서 재임시에 세자(후의 인종)의 학문을 도왔고, 선조초에는 경연관으로 경사(經史) 강론에 종사하였다. 선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에게 배웠으므로 항상 이르기를‘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였다. 만년에는 왕명으로 경서의 구결언해(口訣諺解)에 참여하여 <대학>을 완성하고, <논어>를 주해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성격이 소탈하여 집안살림을 전혀 할 줄 몰랐으나 사람들과 세상 이야기를 할 때나 학문에 대한 것, 정치하는 도리에 관한 말을 꺼내면 그의 부철한 소견과 해박한 지식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었다. 이항, 김인후 등과 함께 호남지방의 학풍조성에 기여하였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미암일기』,『속몽구(續蒙求)』등이 있다. 미암일기는 1567년(선조 원년) 10월 1일 부터 1577년(선조 10) 5월 13일까지 11년간의 기록인 미암일기는 사료적 가치가 크고 원본이 전하고 있다. 이 일기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료총간(제8)으로 간행하였고, 담양향토문화연구회에서 국역간행(1992∼1996)하였다. 담양 대덕면 장산리 모현관에는 미암집 목판 396판(1869년 판각), 고문서(1910년 이전 197건), 전적(1910년 이전 36건)과 유품과 의암서원 관련자료가 있다. 곁에 미암사당(장산리 213,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6호)과 연계정이 있다. 유성춘과 형제간이며 아들 유경렴이 하서 김인후의 사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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