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담주리(潭州里)
담주현(潭州縣)의 역사적 증현(證現)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담주마을로 이름하였다 하며, 관방제가 축조되기 이전에는 닭전머리라 하였고 전 명성극장 서편쪽에 미나리강이 있어 그 부근의 지명이 되기도 하였다.
천변리(川邊里, 3개로 분구)
영산강 상류인 담주천이 본 마을을 감아 흐른다 하여 천변리라 이름하였다 하며 병문거리, 비석거리, 소전머리라고 불러오던 곳이 있었다.
지침리(紙砧里, 3개로 분구)
옛날에 한지공장이 있었다 하여 지침리라 부르며 지방거리, 조방거리, 효자비거리라 불려오던 곳이 있었다.
객사리(客舍里, 3개로 분구)
조선시대에 관리가 식을 올리고 임금의 명을 받아 지방에 내려온 벼슬아치를 접대 한 곳을 객사(客舍)라 하여 각 고을마다 있었는데, 그 유래를 잇기 위해 객사리라 이름하였고 남정지, 단상거리, 장성배기, 고맹이징개, 삿갓전머리(윗장터), 팽나무거리라 불리운 곳이 있었다.
백동리(栢洞里, 6개리로 분구)
삼거리, 신기마을, 내동, 서당골, 미리산마을로 나누어지며 삼거리와 내동 일부의 서남쪽을 창고등이라 불렀고 백동1리를 향백동이라 칭하며, 주민들은 대부분 대대로 살아온 토착 주민들로 구성되었으나 청전아파트는 주민이 외지에서 입주하여 주민들 상호간의 이질감이 상존, 단일 행정리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청전아파트에 대해서 백동5리의 분구를 2000년 3월 27일 담양군 조례 제1629호로 개정, 동년 5월 1일 백동5리로 하고, 서당골을 백동 6리로 분구 2005.1.1일 담양군조례제 1774호로 개정되었다. 삼거리와 서당골은 고려 중엽 현재의 향백동과 동시에 형성되기 시작한 마을로 추정되지만, 마을의 정확한 형성 연대에 관한 기록을 확인하기는 힘들다. 다만, 1914년 담양군과 창평군이 통합되면서 신기리, 내동, 삼거리, 향배동 일부, 두곡리 일부를 합하여 백동리라 하고, 담양읍에 편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후로 삼거리와 서당골에는 점차 인구가 유입도고, 호수가 늘어나게 되었으며, 1961년 담양군 조례 제2호에 의해 백동리가 백동리 1구와 백동리 2구로 되었다가, 1990년 백동리 2구로부터 미리산이 백동리 4구로 분구되어 나가고, 현재는 삼거리와 서당골만이 백동리 2구에 속한다.
백동리 2구는 담양읍에서 찾기 힘든 인재 교육의 요람이다. 이는 서당골에 담양 국씨들이 입향할 당시 관에서 서당을 지어 학문을 장려했었다고 전해오는 사실, 그후 일제시대에는 삼거리 254번지에 광덕학교를 세워 인재를 키웠었다는 사실, 그리고 1997년 백동리 2구 256-4번지에 담양군 공공도서관이 신축되어 담양군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 육성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사실 등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또한 최근 백동리 2구의 발전 상황은 담양읍 도시발전의 중심 축을 급속히 이곳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농업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당시 관에서 축조하였던 백동리 2구 백동저수지가 1990년 매립되었고, 그곳에는 축산업협동조합, 임업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 농업기반공사, 한국전력공사, 경찰서 등 관내 주요기관들이 들어서고 있다.
남산리(南山里, 2개로 분구)
남산의 산이름을 따서 남산리라 하였는데 그 이전에는 효자리라 불렀고 동정마을에는 황새목이라 불리운 곳이 있으며 조개방죽, 양샘거리라 불리운 곳이 있었다.
향교리(鄕校里, 3개로 분구)
향교가 창건된 후 향교리라 하였으며, 취영마을을 서원리, 향교1리를 행기마을, 광동마을을 원굴이라 불렀으며, 향교3리는 향교2리에 도립 담양대학이 개교함에 따라 운교리 지역에 이주주택단지를 조성하여 이주함에 따라 별도의 취락이 형성되었으나 이 지역 대부분의 주민은 향교2리 도립 담양대학 편입부지 거주 주민으로서 향교2구와의 지연 및 혈연관계가 있어 향교3리로 분구를 희망하여 실태조사 결과 운교리와의 거리가 1Km 이상 떨어져 있으며, 향교2리와의 거리가 200m에 불과하므로 담양군 조례를 개정, 2000년 3월 27일 향교3리로 하였다.
만성리(萬成里, 2개로 분구)
지세적으로 추월산의 정기가 뻗어 만사가 성숙한다하여 만성리라 이름하였고, 와우동 또는 완동으로 불렀고 만성2리는 벌을 많이 기른다 하여 벌뫼라 불었다.
양각리(羊角里, 2개로 분구)
술매,시산마을로 불렀고, 양각산 남쪽을 새터라 하였으며,서편의 마을을 사미정 또는 재미장이라 불러오고 있다.
강쟁리(江爭里, 3개로 분구)
강이 흐른다 하여 물강(江), 물줄기가 서로 합류되어서 싸우는 듯 하다하여 다툴쟁(爭)을 따서 江爭里라 하였다. 강쟁3리는 기존 강쟁3리 신성마을과 반룡1리에 속해 있는 마두마을이 편입된 것이며, 두곡마을과 3개마을이 있다. 신성마을을 일명 창고등이라고도 불렀다.
반룡리(盤龍里, 3개로 분구)
1680년경 창촌되어 반룡리라 칭하였으며, 반룡1리에 담양공고 개교와 함께 인근주변 주택 신축 등으로 세대수가 증가하여 분구의 필요성이 요구되어 반룡1리의 새터마을인 마두마을을 강쟁3리로 편입하였다. 반룡2리에는 조그만 동산이 있는데 이 동산이 용의 구슬(珠)과 같다하여 용주마을이라 불리우며, 반룡3리는 600년 전부터 구터로 불리워 오다가 신촌으로 개칭되었다.
오계리(五桂里, 3개로 분구)
1600년경 개촌되어 오현동이라 하였는데 마을뒷산인 남산을 옥녀봉 또는 옥녀탄금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거문고줄에 비유하여 명명하였으며 그후 오계리라 개칭 하였고, 계동마을은 마을 좌우후편에 계양산이 감싸고 있다하여 계동(桂洞)이라 하였다. 매화아파트를 오계 3리로 분구 2005.1.1일 담양군조례1774호로 개정
학동리(鶴洞里, 2개로 분구)
약 1000년경 성촌되어 단산리로 불러오다가 학동으로 개정되었으며 양곡마을과 법정리를 이루고 있다.
금월리(錦月里, 2개로 분구)
500여 전부터 계실 마을로 불러오다가 연화촌(蓮花村)으로 개정하였으며 금월마을은 좌측에 금강수(錦江水)란 못이 있고 뒷산은 반월형으로 되어 있어 금과 월을 따서 금월이라 칭하였다 한다.
삼만리(三萬里, 3개로 분구)
1300년경 창촌되어 삼무마을로 불러오다가 그후 삼만마을로 되었고 오정마을은 마을중앙에 정자를 짓고 오정이라하였으며, 선계마을은 1000년경 형성되었으며, 내동마을은 고대실로 불리워오다 조선말엽부터 내동마을로 불러오고 있다.
운교리(雲橋里)
장월리 또는 구름다리로 불러오다가 조선말엽부터 운교리라 개칭하였다.
삼다리(三茶里, 2개로 분구)
약 500여년 전부터 다전리(茶田里)라 불러오다가 동다(東茶), 서다(西茶), 외다(外茶) 등 3개마을을 총합하여 삼다리라 개칭하였으며 다시 내다마을과 외다마을로 구분되었다.
가산리(佳山里, 2개로 분구)
가산(佳山)마을과 회룡(會龍)마을로 나누어져 있으며 가산마을은 약 500년전 내동으로 불리워오다 조선성종때 고가매라 개칭하였다 하며, 회룡마을은 용마가 태어난 곳이라 하여 생말로 불러오다 조선 말엽 용들이 몰려있는 지형이라하여 회룡이라 바꾸어 부르고 있다.
대추리
조선영조때 大野里로 하였으며 그후 大村里로 불러오다가 大秋里로 改稱 한다.
도고리
1904년에 都古停이라 불러 왔으며 담주현의 도읍지로 도고로 칭했다.
곡정리
400년전 마을입구가 아홉 갈래의 굽은 길로 되었다하여 九分里로 칭하다가 1945년 曲亭으로 개칭하였다.
제월리
조선말엽 주위 산세가 거북이 형이라 하여 龜尾同이라 불러오다가 1945년 제월리로 개칭하였다.
서봉리
1871년 면앙정이 소재한 산계곡에 터를 잡아 棲鳳이라 칭하였다.
마항리
조선중종때 마을 뒷산 제월봉의 형국이 "말이 머리를 숙여 오례천의 물을 마시는 모습"이라하여 馬項이라 칭하였다.
신학리
조선 임진난 후 新谷이라 불러오다가 마을 뒷산 형태가 "학이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新鶴이라 칭하였다.
학동리
1400년전 白水村이라 불러오다가 샘마을로 개칭되었고 "동방에서 학이 마을 앞 평야로 하강하는 모 습"이라하여 鶴洞이라 칭하였다.
탄금리
950년전 西邊里라 불러오다가 옥녀봉에서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국이라 하여 彈琴으로 개칭하였다.
방축리
1700년전 마을뒷산에 송아지가 풀을 뜯는 형국이라 하여 防丑으로 부르다가 1906년 防築으로 개칭하였다.
연산리
1600년전 연산으로 부르다가 1945년 半月마을 통합 형성후 1981년 半月이 독립 되었다.
상덕리
1579년 마을이 형성 되었고 觀德山을 비롯하여 사방이 낮은 야산으로 둘러 쌓인 원형을 이루고 있다.
송산리
1929년 구암리로 불러오다가 1945년 松山으로 개칭되었다.
반월리
1945년 創村으로 연산마을에 속해 있다가 1981년 행정구역 조정 으로 반월마을로 독립했다.
연동리
1443년 池洞마을로 불러오다가 조선말엽 淵洞으로 개칭하였다.
죽림리
570년전 大西半이라 불러오다가 조선말엽 동남북이 야산이며 주위가 울창한 대숲으로 쌓여 竹林이라 개칭하였다.
유산리
510년전 마을이형성 楊山村으로 불러오다가 조선말엽 柳山里로 개칭하였다.
마산리
1570년 마을이형성되어 동남으로 마을을 애워 쌓고 있는 산 모양이 말이 뛰어가?형태의 모습이라 하여 馬山이라 칭하였다.
양지리
1569년 마을이 형성 해와 달이 솟으면서 맞는 곳이라 하여 陽地이라고 칭하였다.
월전리
360년전 독수고을이라 칭하였고 양지 샛터로 불러오다가 양지마을 에서 독립하여 월전이라 칭하였다.
와우리
1582년 孝峙 라 칭하다가 그후 臥牛里라 칭하였다.
신평리
510년전 마을이 형성된후 宅里라 불러오다가 조선말엽 莘坪이라 했다.
봉학리
1760년에 형성 뒷산의 형국이 봉황새가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봉학정이라 불러오다가 夫業亭으로 바뀌었고 조선말엽 봉학 이라 개칭하였다.
삼지리
1479년 三島村이라 불러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三支里라 칭하였다.
교산리 교촌(校村)마을
1400여년경 마을이 형성되고 원래 창평현 현내면에 속해 있었고 마을위에 창평향교가 위치하여 교촌이라 칭하였다.
교산리 하북산(下北山)마을
1670여년경에 개척되어 長成물이라 불렀으며, 향교 뒷산이 능선의 북쪽을 향하고 있다고 하여 하북산으로 칭하였다.
고읍리 덕촌(德村)마을
1450여년에 개척되어 덕향촌으로 불렀으며, 200년전 창평현청이 현 창평면으로 이전되면서 구읍과 덕촌으로 칭하였다.
고읍리 신양(新陽)마을
1650여년경 마을이 형성되어 새터라 불러오다가 조선중엽에 신양으로 개칭하였다.
분향리 잣정(栢亭)마을
1430년경 마을이 형성되어 분향(芬香)이라 불렀으며, 정조17년(1793)에 마을동편에 큰 잣나무와 정자가 있어서 잣정 (栢亭)으로 개칭하였으며 광주호가 위치해 있다.
분향리 용대(龍臺)마을
1580년경 마을이 형성되어 대바위로 불러오다가 마을 오른편에 큰 바위가 있고 바위아래 깊은 물에는 용이 살았다 하여 용대라 불리어 오고 있다.
금현리 운현(雲峴)마을
1390년경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창녕조씨 조호(曺鎬)의 호가 운곡으로 雲자를 따서 구름속의 달이 출현한 것 같다 하여 운현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금현리 금단동(金丹洞)마을
1640년경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주변에 금단풍나무가 무성하여 금단동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금현리 노채(蘆采)마을
1850년경 창촌되었으며, 학이 집을 짓기 위해 갈대를 물고 날아왔다 하여 갈대 노자를 따서 노채라 부르게 되었다.
성월리 성산(聲山)마을
1580년경 마을이 형성되어 당시 소리뫼로 불러오다가 일제때 지금의 성산으로 개칭하였다.
성월리 광산(廣山)마을
1680년경 마을이 형성되어 산촌 또는 평촌으로 불러오다가 광산으로 개칭되었다. 당시 산촌에 접해있는 산하에 현인독서라는 터가 있다하여 산명을 광성산이라 하며, 촌명을 광산이라 칭하였다.
성월리 월전(月田)마을
1800년경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명을 월출시 경사진 산허리가 월광을 밝게 반사해준다 하여 달밭이라 불러오다가 일제시 월전으로 개칭하였다.
성월리 검단(檢丹)마을
151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이름을 가늘계라 불러오다가 마을뒷산이 선인독서형이며 선인은 단을 먹고 잔다 하여 검단으로 개칭하였다.
성월리 해평(海坪)마을
1900년경 마을이 형성되었고, 무등산에서 흘러내리는 증암천이 이 마을로 흘렀는데 큰 홍수로 물줄기가 현 증암천 으로 돌게되어 천과 평야가 바꾸었다 하여 해평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보촌리 내보(內甫)마을
1400년경 마을이 형성되어 서촌이라 불러오다가 그후 방죽안이라 하였고, 일제때 내보라 개칭하였다.
보촌리 외보(外甫)마을
1730년경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앞 전답이 하늘받이로 '비가 안오면 하늘만 보랏는다'하여 보라실(谷) 또는 신기라 불러오다가 그후 외보라 개칭하였다.
주산리 주평(舟坪)마을
1790년경 마을이 형성되었고 모갈리라 불러오다가 1945년 주평리라 개칭하였다.
주산리 주산(舟山)마을
1780년경 장산 마을이 큰 수해를 입자 이곳 높은 지역을 택하여 정안차씨들이 이주하여 창촌되었고, 마을을 새터 로 불러오다가 조선순조때 주산리로 개칭하였다.
주산리 장산(長山)마을
1750년경 마을이 형성되어 장전으로 불러오다가 1823년에 장산으로 개칭하였다.
원강리 원유동(院柳洞)마을
1575년경 창촌되어 앵원(鶯園)으로 불러오다가 유동으로 개칭하고, 창평현이 담양군으로 귀속되면서 원유동이라 한다.
원강리 월곡(月谷)마을
1670년경 마을이 형성되어 월곡이라 하였는데 마을모양이 반월과 같다하여 명명했다.
동운리 동산촌(東山村)마을
1630년경 마을이 하촌막 되고, 마을동쪽에 동산이 있고 서쪽에 석골로 된 동산이 있다하여 동산촌이라 개칭했다.
동운리 운교(雲橋)마을
1650년경 마을이 되고 마을뒷산의 모양이 운중반월(雲中半月) 같다서 운월이라 불러오다가 구름달을 구름다리로 바꾸어 운교라 개칭하였다.
동운리 원등(院嶝)마을
1880년경 마을이 형성되어 원등이라 했고, 면소재지로서 각급기관과 공장등이 건립되어 소도읍을 형성하고 있다.
동운리 신원등(新院嶝)마을
고서면 소재지인 원등마을의 인구증가와 상가조성등으로 분구의 필요성을 느껴 1989년 8월 1일 신원등이라 칭하였다.
산덕리 상덕(上德)마을
1890년경 마을이 형성되면서 상덕이라 하였으며 1977년 마을전체가 聚落構造 개선사업을 했다.
산덕리 후산(後山)마을
1180년경 후산이란 사람이 개척한 마을로서 호를 따서 후산이라 칭하였으며, 문화재인 명옥헌원림과 인조대왕 계마수가 위치하고 있다.
학선리
본래 창평군 내남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개선동, 외지곡, 학미동 일부와 광주군 석제면의 덕의리 일부를 병합하여 학미와 개선의 이름을 따서 학선리라 하여 담양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지곡리
본래 창평군 내남면의 지역으로써 지실 또는 지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석리를 병합하여 지곡리라 해서 담양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연천리
본래 창평군 내남면의 지역으로써 제비내 또는 연천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산음동, 취연리, 반색리 일부와 광주군 상대석면의 당촌리, 평촌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연천리라 해서 담양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정곡리
본래 창평군 내남면의 지역으로써 안골짜기가 되므로 속골 또는 정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봉리를 병합하여 정곡리라 해서 담양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경상리
본래 창평군 내남면의 지역으로서 경상굴 또는 경상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환암촌을 병합하여 경상리라 해서 담양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무동리
본래 창평군 외남면의 지역으로서 북산(군 산천)밑이 되어 아이가 춤을 추는 형국이므로 무동촌 또는 무동이라 하였다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구촌을 병합하여 무동리라 해서 담양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만월리
본래 창평군 외남면의 지역으로서 망월봉 밑이 되므로 망월 또른 만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룡촌, 석계리, 상룡이, 용연촌을 병합하여 만월리라 해서 담양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구산리
본래 창평군 외남면의 지역으로서 거북뫼(산)가 있으므로 거북뫼 또는 구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단리를 병합하여 구산리라 해서 담양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인암리
본래 창평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기린바우가 있으므로 기린바우 또는 인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인암리라 하여 담양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가암리
본래 창평군 외남면의 지역으로서 마을 뒤에 구멍바위가 있으므로 구멍바우 또는 혈암 또는 오리나무 정자와 반석이 있어서 길손과 장사꾼들이 쉬어 가므로 오리터, 가암정이, 가남정이 또는 가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촌, 자창리를 병합하여 가암리라 해서 담양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풍암리
본래 창평군 외남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화암촌, 학학, 연풍정을 병합하여 연풍정과 화암의 이름을 따라 풍암리라 해서 담양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창평리(市洞,射洞마을)
백제시대에 마을이 형성되었고, 당시 극심한 한발로 우물이 말라 식수난을 겪었으나 五里村의 방죽은 마르지 않아 오리이상 주민이 식수를 길러갔다 하여 五里村이라 불러왔다하며 시장이 있는 곳을 市洞,射亭이 있었다 하여 射洞이라 불리운 곳이 있다.
三川里(上三川,下三川마을)
백제시대에 마을이 형성되어 古家가 많으며 동편에 月峰山과 남쪽에 國首峰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三支川이 흐르고 봉황이 날개를 뻗어 감싸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삼천리라 칭하였으며 현재는 상삼천, 하삼천으로 분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龍水里(水谷마을)
조선 성종때 개척되었으며 마을 뒤 명산인 月峰山과 萬德山의 기슭에藥水川이 솟아 이 물을 식수로 사용하여 장수하였다하여 壽谷이라 불렀으며, 조선말엽에 水谷으로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龍雲마을)
약 1000년전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뒷편 산세가 飛龍施雨하여 龍雲洞이라 칭하였고 上月亭이 있다.
柳川里(柳川마을)
지금부터 약 1400년전에 마을이 형성되어 柳村이라 불러오다가 조선인조때 柳川으로 개칭하였다.
(下素川마을)
조선 선조때 개척되었으며 원래 하소천은 강이였는데, 이 강을 메워서 마을터를 잡았다 하여 하소천이라 칭하였다.
梧江里(悟山마을)
지금부터 약310년전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이름을 悟梅로 칭하였다가 조선말 悟山으로 개칭하였다.
(唐谷마을)
지금부터 약 1300년전 개척되어 堂谷이라 칭하다가 일정때 唐谷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江村마을)
고려 공민왕때 마을이 형성되어 渴焉谷里라 부르다가 현종때에 강촌이라 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義項里(普坪마을)
약 910년전에 개척되어 말들이라 불러 오다가 조선발에 보평으로 개칭하였으며 1978년에 취락구조개선사업을 시행하였다.
(義岩마을)
光武時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뒤에 귀 바위가 있다하여 耳岩이라 부르다가 義岩으로 개칭했고, 1979년에 취락구조개선사업을 시행하였다.
一山里(下山마을)
약 510년전에 개척되어 洪골로 부르다가 조선말에 下山으로 개칭하였으며 활터가 있어 射場골로도 불렀다.
(上山마을)
조선중종때 개척되어 東골이라 불러오다가 조선말기에 상산이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長華里(長田마을)
조선선조때 개척되어 진밭골이라 불렀는데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 소쿠리형의 山주령을 따라 진밭들이 길게 이어졌다는 데서 연유되었으며 그후 장전으로 개칭하였다.
(華陽마을)
1500년경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원래 華陽寺라는 절이 있어 화양사라 부르다가 영조시대에 화양촌이라 개칭하였다.
維谷里(절산마을)
약 510년전 성종시대에 개척되어 上維谷이라 불러오다가 그후 절산이라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蓮花마을)
약310년전 마을이 형성되어 때와등이라 부르다가 지형이 연꽃모양이라 하여 연화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基洞마을)
지금부터 약 310년전(숙종)에 개척되어 텃골로 불러오다가 일정때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海谷里(維谷,얼그실마을)
조선 선조때 창촌되었으며 사방모양이 고양이, 쥐, 범, 코끼리를 상징하고 있어 상생상극이 동서남북으로 얼켰다하여 얼그실(維谷)이라 칭하고 있다한다.
(內洞마을)
약 510년전(성종)에 개척되어 내동이라 부르다가 1980년부터 春川이라 칭하였고 다시 내동으로 부르기도 한다.
(富洞마을)
지금부터 약 840년전(명종)에 개척되었으며 마을 이름을 富春山아래있다하여 부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聖德마을)
1380년에 개척되어 富春이라다 숙종때 松江書院이 창건되므로 書院里라고도 하였고 성덕이라 칭하게 되었다.
廣德里(烏峴마을)
1580년 마을이 형성되었고 뒷산의 형태가 새의 머리같다 하여 새고개(烏峴)라 칭하였다.
(新興마을)
지금부터 약 310년전에 창촌되면서 新興이라 불러왔으며 조선말엽에 廣岩里라 하였으나 일정시 다시 신흥이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玄岩마을)
임진왜란시 난을 피하여 개촌되면서 玄岩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外東里(외동마을)
800년전 편씨들에 의해 개척되고 마을이름은 草餘로 불러오다가 1800년 외동 불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4년 3월1일 남 면(현 가사문학면)으로 편입하였다가 1990년 4월1일부로 창평면에 편입되었다.
梅山里 社倉마을
사창마을은 300여년전 연주 현씨와 광산김씨가 일시 거주하다가 이거한후, 1520년경에 전주이씨가 다시 터를 닦아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뒤로 매봉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고 동남쪽으로는 만덕산을 마주보며 서쪽으로 정제등이 있으며 정제등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전설이 서린 바리봉이 남쪽에 있다.
옛날엔 마을주변에 감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감나무골, 혹은 시곡이라 불렀으며 또한 사당리라고도 하였으나 담양부가 관리하던 곡물 보관의 외창이 마을앞 서적골에 서게되어 그때부터 사창리라고 불러 오늘에 이르렀다.
梅山里 藤葛마을
1507년경 전주인 이서공 추성수를 중심으로 한 그 일가가 고서면 후산 마을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개척당시 수백년 묵은 칡덩굴이 휘덮고 있어 등갈이라 이름 하였다는 말이 전해온다. 처음 터를 닦기 위해 땅을 파헤쳤을 때를 기다리던 송아지가 세상에 나왔다는 명당정설이 전해오는 가운데 판사, 경찰서장등 자연마을단위로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긍지를 갖고 있는 이 마을은 39호에 103명이 살고 있다.
梅山里 大鳥마을
대조동 마을은 약 450년전 전주이씨가 정착하였고 지세가 천학하전의 명당터로 천년을 더 산다는 학이 하늘에서 내려온 터라하여 대종동 또는 한새울이라 불렀으며 설매 또는 한매라고도 하였다.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이 많은 마을터로 서쪽 진등 노서하전 명당터에 면사무소가 세워졌으며 부근 매화낙지 명당터엔 만덕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문화재로는 전라남도지정54호 몽한각이 있는데, 몽한각은 조선조 태종의 5세손인 이서가 1507년 창평으로 유배되었다가 1520년 유배에서 풀려나 이곳 매산리에 머물어 살았는데, 1803년 담양부사 이동야와 창평현령 이훈휘가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梅山里 新葛마을
신갈마을은 마을이 생기기 전인 1978년전까지는 인근 득인산 동편 기슭에 잇닿은 야산이었으며 인근 사람들은 옛부터 이곳에 물팍등이라는 명당터가 있다고 믿어왔고 그리하여 우괴동 혹은 물팍쟁이라고도 부르는 곳이었다. 1978년 정부의 농촌근대화시책에 고속도로변 환경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취락구조 개선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당시 도지사가 현지확인중 농촌문화 취락적지로 선정하였다. 1978년 부근 일대의 토질이 적벽돌 제작의 적지로 판정되어 호남 적벽돌 새마을 공장이 건립되었으며 우량벽돌로 인정 받아왔다. 마을 뒤쪽이 식물원으로 조성되어 경관이 수려하고, 앞에는 호남고속 도로가 관통하고 있는 이 마을은 39호에 129명이 살고 있다.
獐山里 大小山마을
대소산 마을은 500여년전 충청도 지방에 살던 육행공 관산인 김처겸이 동문수학했던 밀양인 박양산과 함께 터를 잡았다. 매봉의 정기가 뻗어 내리다가 한데 모아진 서당재 아래 득인산을 마주바라보며 못살아도 오가리솥은 면하고 큰 인물을 얻을 수 있다하여 터를 닦았으며 동서로 밀양인 박씨가 잡은 터를 소산, 광산인 김씨가 잡은 터를 대산이라 하였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대소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한 사람이 많아 그때마다 마을앞에 세웠다는 솔대가 열두개나 되었으며 당시 고을원님 현감도 그 앞을 지날때는 반드시 절을 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1981년 광역권사업으로 길을 확장한 마을앞 “매비선”은 비차리, 창평 장화리로 연결되는 군도이며, 현재 34호에 87명이 살고 있다.
獐山里 獐洞마을
1952년경 평강채씨가 개척하여 안양동이라 부르다가 1471년 대곡리로 개칭하여 1624년경 구화동으로 불렀으나 마을 뒷산이 노루형상이라 하여 장동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부르고 있는 노랑골은 노루골에서 변형된 이름이다. 주요 인물로는 고려말 정승을 지낸 평강인 고성군 채문무의 태생지이며 조선 선조때 미암일기를 저술한 미암 유희춘이 기거한 곳이다. 전원생활을 즐기는 외지인의 정착이 늘어가고 있고 31호에 80명이 살고 있다.
비차리 차동마을
차동마을은 450여년전 하동정씨가 처음 입주하였으며 뒤이어 홍양이씨와 김해김씨가 들어와 터를 닦고 정착하였다 전한다. 마을의 형세가 하늘에서 금비녀가 날아와 떨어진 명당이라 하여 비차동 또는 차동이라 하였다. 1970년 마을주민 25명이 사치와 낭비를 없애고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자는 목적으로 조직한 월무계원들이 세운 영월정이 있다. 조선조 명종때 담양부사 김희필이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할 때 심었다는 당산목이 지금도 마을입구에 자리하고 있어 당산제를 지내고 있으며 정월 대보름이나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농악놀이가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비차리 가흥마을
가흥마을은 200여년전 이웃마을인 대산마을에서 살던 광산김씨 일가가 옮겨와 터를 닦았다가 창녕조씨 일가가 다시 일궈 정착하였다. 처음에는 감골이라 불렀으나 주변 산세가 아름답고 맑은땅이라 하여 가흥동이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옛부터 주민들은 민심이 순후하고 효행이 지극하여 효자, 효부, 열녀가 끊이지 않았으며 남을 시기하지 않아 예의 바르고 조용한 마을로 알려졌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불행의 6.25사변때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도 민심이 후덕한 때문이었다고 전해온다. 마을주변 토질이 좋아 도라지등 특용작물을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현재 15호에 44명이 살고 있다.
錦山里 撫月마을
무월마을은 고려말기 교동 인씨들이 처음 입주하였으나 흥성하지 못하고 조선조 초기 흥성 장씨들일 다시 개척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한다.마을 옹기를 구워 점등이라고 불렀으며 옹점리란 마을 이름은 이때 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1968년 만덕초등학교 분교인 금당초등학교가 설립되었고, 1983년 보건진료소가 개설되어 의료혜택도 다른 마을에 비하여 빨리 받게 되었다. 현재 44호에 129명이 살고 있다.
錦山里 시木마을
시목마을은 조선조 중엽 금녕김씨와 금성나씨가 입주하여 개척하였다고 전한다. 선도들의 생활습관을 지켜 내려오는 정신이 강하여 특히 당산제를 통하여 마을 주민들의 단합을 일깨우고 있기도 하다. 지형적인 기후조건과 피나는 노력의 결실로 1993년 대덕단감영농조합법인이 설립되면서 단감나무 단지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현재 25호에서 단감 31㏊를 재배하고 있으며 58호에 171명이 살고 있다.
聲谷里 聲谷마을
성곡 마을은 1520년경 밀양박씨와 창녕조씨 일가가 입촌하여 정착하였으며, 당시 마을 남쪽에 위치한 옥천동의 옥천사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의 덕을 입어 마을이 시시로 번창한다 하여 성신리로 불려 오다가 1910년경 성곡리로 개칭하였으며 일명 새말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마을 앞을 지나는 고속도로 건너 산에 베틀굴이라 부르는 동굴이 있는데, 임진왜란때 부근 여러마을 사람들이 이 굴속에 피신하여 베를 짜며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1973년 마을 앞으로 호남 고속도로가 개통되었으며, 1975년 새마을 사업 우수 마을로 선정되어 대통령으로부터 하사금 250만원을 받아 마을 공동답 1,800평을 마련하였고, 1980년 마을 회관을 건립하였다.
雲岩里 下雲마을
하운 마을은 만덕산 북쪽 기슭아래 밀양 박씨 일가가 처음 입주하여 번성하면서 북촌이라고 이름 하였으나 시대의 미상에 폐허되고 바로 아래쪽인 지금의 터로 옮겨 번성 하였다. 일제 시대 일본의 박해에 항거하던 마을 청년들이 애국하는 옥류대를 조작하고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45년 일본이 망하자 마을 정자옆에 해방 기념비를 세워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마을 뒤 만덕산 산정에 1920년대까지 가뭄이 들때면 기우제를 지냈다는 무잿등이 있으며 저수지 부근인 주산에 애기당이라는 샘이 있는데 자식을 낳지 못한 부녀자가 이 샘을 찾아 기원하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현재 44호에 143명이 살고 있다.
雲岩里 上雲마을
상운 마을은 만덕산 등허리를 구름이 감싸고 있다하여 운암리라고 부르며 산 안으로 위쪽에 있다하여 상운이라 하였다. 500여년전 평산신씨와, 순흥안씨 일가가 처음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월봉산 남쪽으로 이어지는 국수봉 아래를 ‘바람 난 골’이라 부르며 이곳은 일제시대부터 1986년까지 중석이 생산되었으나 중단되었다. 주민들이 퇴비증산에 열성적이어서 해마다 군내 퇴비증산 경진 대회에서 상을 받은 퇴비증산 우수 마을로도 유명하다. 현재 23호에 74명이 살고 있다.
雲岩里 八鶴마을
팔학마을은 1926년경 김해인 김창호와 광산인 이병호에 의하여 개척되었고 1950년 6.25사변이후 외지에서 이거하여 온 사람들이 많아 증촌되었다. 팔학마을은 당초 지형이 학처럼 생겼다 하여 팔학으로 지칭되었으나 마을 주변에 도로가 개설되면서부터 마을에 우환이 있자 팔학으로 개명하였다 한다. 1978년 취락구조개선사업을 벌여 재래식 주택을 문화주택으로 개량하여 환경을 크게 바꾸었고, 현재 24호에 60명이 살고 있다.
文學里 內文마을
내문 마을은 신라말엽에 생겼다고 전해오나 확실하지 않고 연대 미상에 광산 김씨, 금성 나씨, 밀양 박씨 일가가 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앞 만덕산에 농바위라 불리는 큰바위 밑으로 아주 큰 굴이 있었는데 난리때는 인근 주민 만여명이 피난하여 목숨을 구했는데 이때 만인이 산의 덕을 입었다 하여 만덕산이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 1979년 취락구조개선사업으로 19동이 이태리식 문화주택으로 개량되었으며 마을회관이 신축되었고, 현재 33호에 84명이 살고 있다.
文學里 外文마을
외문마을은 만덕산을 남으로 등지고 북으로 매봉산을 바라보며 위치한 면내 유일의 전 주택이 북을 향해 있는 반월형 마을이다 1470년경 곡성군 오곡에서 살던 해주 오씨 일가가 이주해와 개척하였다고 전하며 마을 이름을 외문치, 밖문재, 분문재, 밭동구등으로 불리다가 다시 외문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500여년 묵었다는 당산나무는 매년 잎이 무성하면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들고, 잎이 조금씩 여러번 피면 가뭄이 왔다는 신비로운 전설이 전해오기도 한다. 1977년도 취락구조개선사업으로 노후주택을 전부 철거하고 마을터를 재 정리하여 문화주택 38호를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현재 34호에 114명이 살고 있다.
龍坮里 龍坮마을
용대 마을은 고려말엽 송도에서 남하하여 은둔지를 찾던 성명 미상의 왕씨가 처음 터를 잡았으나 번성하지 못하고 조선조 중종때 남평 문씨와 전주 이씨가 정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이 찾아들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가재제 윗쪽에 자리잡고 까치가 많아 가재동 또는 가작동이라고 불러 왔으나 마을에 이유없이 불이 자주 나므로 담양부사에게 그 사유를 고하니 부사가 직접 찾아와서 지세를 살피고 비룡의 형이라 하여 용대라 개칭하여 주었다 한다. 1968년 가재제가 축조되었고, 1977년 간이상수도가 설치되었으며 1985년에 보건진료소가 건립되어 벽지 진료혜택을 받고 있다. 현재 43호에 93명이 살고 있다.
龍坮里 靑雲마을
1870년경 경기도 여주에 살던 밀양인 박재호 일가가 사화를 피하여 가사문학면 경상리로 이거하여 살면서 보다 좋은 명당터를 찾던 중 이곳 산수가 청운의 서기가 있어 필시 운중발룡이 할 지세로 가히 안주할만한 곳이라 믿고 정착하였다고 한다. 마을이 생기기 전에 이 터에 내운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주변 곳곳에서 옛 기왓장이 자주 출토되고 있다. 그 뒤 김해김씨 일가가 들어와 같이 개기하였으며 마을 이름을 청운동이라 하였다.
龍坮里 水谷마을
수곡 마을은 조선조 초기 마을 북쪽에 있었다는 옥천동 옥천사에서 일하는 기와공인 김포 공씨와 남평 문씨가 터를 일구고 살기 시작하였다. 남과 북으로 사이를 두고 방아제 마을과 바쟁이마을이 형성되어 두 마을을 합쳐 수곡이라 한다. 현재 12호에 18명이 살고 있다.
葛田里 下葛마을
하갈 마을은 300여년전 현풍 곽씨가 처음 터를 닦았다고 하며 그후 나주 다시에 살던 수성 최씨 일가가 복된 자리를 찾아 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러 적덕봉에 선인독서라는 명당이 있다는 설을 듣고 정착하였으며 마을 주변에 칡이 많이 자생하여 칡골이라 부르다가 다시 갈전이라 불렀으며 1908년경 윗마을 상갈과 불리도어 하갈마을로 되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동복천은 화순 북면 맹리, 월곡부락과 군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 적덕봉 아래로 수성천이 흐른다. 마을 뒤로는 황새형국인 곤매산이 있으며 마을앞 주 농경지는 모래보들과 고라보로 불리운다.
葛田里 上葛마을
상갈마을은 시대 미상에 남원 윤씨 일가가 입주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이 개척되기전 온 산야에 칡이 많아 자생하여 갈밭이라고 불리었으며 다시 두 마을로 분리되어 상갈이라고 하였다. 1930년 일제시대 마을앞에 학교가 세워져 용산간이학교라 불렀는데, 건립 당시 북쪽의 용대리, 남서쪽의 운산리의 명칭을 하나씩 따서 용산간이학교라 하였고, 1944년 용산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雲山里 楮深마을
저심 마을은 500여년전 전 김해 김씨가 처음 입주 정착하였으며 마을 뒤 큰산이 돼지 형국으로 돼지 혈이 길게 뻗은 곳에 자리 잡았다하여 저심이라 부르다가 또한 한지 재료인 닥나무가 인근에 많이 자생하여 한지를 생산하였으므로 다시 글자를 바꿔 저심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마을 서편의 금계봉은 임진왜란때 주민들이 화를 면하기 위해 이곳 바위 동굴로 들어가 베를 짜며 살았는데 왜병들이 베짜는 소리를 듣고 무슨 새소리가 이토록 아름다운가 하고 탄복하여 그냥 지나쳤다하여 금계봉이라 이름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雲山里 山亭마을
산정 마을은 400여년전 고씨 일가와 이씨 일가가 난을 피하여 심심산중으로 들어 오던중 수양산의 정기가 이 터에 서렸다 하여 정착하였다 한다. 마을 뒤로 소규모 경작지가 있는 가작골이 있고, 서편으로 1950년 초에 완성된 100여두락을 몽리할 수 있는 산정 저수지가 있으며, 부근을 오작골이라 부르고 마을 앞들을 대바우 골이라 부른다. 뒷산 수양산에 지상양지라는 명당이 있어 하늘에서 내려온 옥녀가 약수에 목욕하고 베를 짜고 살았다는 전설어린 옥녀골이 있으며 앞산 앵무봉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인들이 글을 읽었다는 선인독서라는 터가 있다.
立石里 立石마을
입석 마을은 조선조 중엽 광산 김씨와 전주 최씨 일가가 난을 피하여 은둔하며 살 땅을 찾아 깊은 산속으로 들어 왔다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다른 산촌과는 달리 바위가 곳곳에 수직으로 서 있는 것이 많아 마을을 지켜주는 석신으로 모시고 제를 지내 왔으며 마을 이름을 선돌이라고 불렀다가 지금은 입석이라 한다. 북쪽마을 입구와 마을 앞에 각각 두 개의 선돌이 있다. 동쪽에 수양산, 서쪽에 국수봉이 있으며 마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도장골, 개탕골, 성적골, 안양골, 진지평 남서쪽으로는 한 대골, 지자골, 우동 한수골, 북쪽으로 수락골, 서북쪽으로 바다골이라 부르는 지명이 있다. 마을 입구에 창촌당시 심었다는 당산나무가 길게 서 있어 마을 북쪽에서 들어오는 잡신을 막아 불행을 없애 준다고 믿어 석신과 함께 당산제를 지네는 풍습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한때는 울창했던 당 산나무가 지금은 느티나무 2그루와 서나무 30여 그루가 노거수로 남아 있다.
봉안리 봉안촌(鳳安村)·술지(述只)마을
백제시대 초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며 당시에는 술기동,부안동,기동,수문동,산태동으로 분산되었던 마을이 합해진후 삼국시대에 술지리로 불리웠다. 조선영조 34년(서기 1758년)에는 담양부 무이동면에 속해 있었다. 한편, 이 마을에는 고대 역사연구에 귀중한 석탑,입석,평면식 고인돌 등이 산재 되어 있으며. 1918년 무면과 정면을 합하여 무정면이 될 때 봉안리 봉안촌 술지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봉안리 수문(守門)마을
조선 정조 24년(서기 18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당시 담양부 무이동면에 속해 있었으며 수문동이라 불렀다.
오룡리 외당(外堂)마을
조선 중종 7년(서기 1532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형성 당시에는 찰박동이라 불리웠으나 조선시대 중엽 안쪽에 먼저 형성되어 있는 마을과 함께 오룡리라 불리웠다. 후일 안쪽마을과 구분키 위해 바깥쪽에 위치 했다 하여 외당마을이라 불렀다.
오룡리 내당(內堂)마을
후삼국시대(서기 900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뒤편에 있는 다석 산마루가 마치 다섯 마리 용이 감싸고 있는 형태라 하여 오룡동이라 불리웠다. 조선시대 중엽 바깥쪽에 있는 마을과 구분키 위해 내당이라 불렀다.
오봉리 오봉(五峰)마을
고종 성종 15년(서기 995년)경에 담주군의 소재지가 이곳에 있었던 같은 흔적(성터와 주춧돌)이 있으며 조선시대 순조때(서기 1800년대 초반)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뒷산 다섯봉우리를 뜻하여 오봉이라 불렀다.
영천리 죽산(竹山)마을
삼국시대(서기 658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뒷산 이름을 따 영천리라 불리웠으며 영천산 아래에 대가 많아 죽산이라 불렀다.
영천리 봉서(鳳棲)마을
조선 인조 20년(서기 1642년)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형성 당시 새로 닦은터라 하여 샛터라 불리웠다. 일제시대에 풍수리지상봉의 보금자리 형태라하여 봉서리로 불렀다.
성도리 도동(道洞)·서정(西亭)마을
조선 영조 8년(서기 1732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형성 당시 도동마을이라 불리웠다. 후에 도동 서편마을은 정자가 있어 서정이라 불리웠고,도동마을과 서정마을의 중간에 있는 마을은 중간에 있다 하여 중리로 불리웠다.
성도리 성덕(成德)마을
백제 무왕때 (서기 6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뒤에 있는 영천산이 장군혈이라 여겨 장군이 되려면 덕을 쌓아야 한다하여 성덕이라 불렀다.
동산리 칠전(漆田)마을
조선 성종때(서기 1475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마을 주위에 옻나무가 많아서 옻나무골 또는 옻밭이라 불리우다 칠전으로 바꾸어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무면 동산리에 속하였으며 1918년 무정면 동산리 칠전마을이 되었다.
동산리 칠치(漆峙)마을
조선 정조(서기 17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마을뒤에 옻나무가 많아서 옻나무골 또는 옻재로 부르다가 칠치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무정면 동산리 칠치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동산리 동산(東山)마을
조선 선조 25년(서기 1592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금산 아래에 자리 잡았다하여 마을 서편에 있는 주민들로부터 동산마을이라 불리워졌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동산리에 속하게 되었다.
안평리 신안(新安)·평장동(平章洞)마을
조선 세종 17년(서기 1435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신안마을은 신안주씨가 살고 있어서 신안동이라 불리웠고 평장동마을은 마을이 평평하고 길게 형성됨에 따라 평장동이라 불리웠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안평리로 개칭하였다.
덕곡리 덕곡(德谷)마을
통일신라 선덕왕(서기 7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소씨가 사는 마을이라 하여 소촌이라 불리웠다. 통일신라 헌강왕때 덕곡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해온다.
서흥리 독곡(獨谷)마을
8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인근 취락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하여 독동(獨洞) 또는 독곡(獨谷)이라 불리웠으며 조선시대에 마을의 길조를 빌기 위해 서흥리로 마을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서흥리 자동(子洞)마을
100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족자동(族子洞)으로 불리웠다. 1961년 담양군조례에 의거 서흥리 2구 자동마을로 개칭하였다.
정석리 정석(貞石)마을
10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며, 집이 있는 고개라 하여 당재 또는 당현마을로 불리웠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마을의 동서남북에 큰 바위가 둘씩 문과 같이 서 있음을 유래로 정석리로 개칭하였다.
평지리 평지(平地)·고정(高亭)마을
조선 선조때(서기 1592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평지마을은 당시 마을주변에 푸른 돌이 많으므로 청석이라 이름 하였다가 조선시대 마을지형이 평평하다하여 펑지리로 개칭하였고,고정마을은 높은데 위치했다 하여 높은쟁이라 부르다가 고정마을로 개칭하였다.
동강리 강정자(江亭子)마을
조선 연종때(서기 169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앞에 오례 강이 흐르고 있어 동강리로 불리웠다. 후일 마을에 정자가 세워짐에 따라 오례강과 정자를 본따 강정자라 부르게 되었다.
동강리 동고지(東古支)마을
신라시대(서기 7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고,연유를 알수 없으나 동고지로 불리워 왔다.
오례리 오례(五禮)마을
신라 선덕왕때(서기 7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후일 이 마을에 행차한 원님이 인간이 지켜야 할 다섯가지 예를 강론하였다 하여 오례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례리 등룡(登龍)마을
고려 명종때(서기 11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고,풍수지리상 용리 하늘에 오르는 지형에 마을이 위치했다하여 등룡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오레리 신촌(新村)·회룡(會龍)마을
조선 정조때(서기 17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고,마을앞 오례강이 용이 꼬리를 치고 도는 형국이라 하여 회룡이라 하였다 하며,당초에는 오례마을에 속하였는데 6.25 동란 후 피난민들이 개척한 신촌마을과 함께 1970년 담양군 조례에 의해 오례 3구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천리(내천마을)
후삼국시대(서기 900년경)에 큰 샘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하여 천동(泉洞)으로 불리웠다. 후에 바깥쪽 마을과 구분을 위해 안시암골로 불리웠으며 조선영조 34년(서기 1758년)에는 담양부 천동면에 속했었다. 고종 32년(서기 1895년)에 내천면에 소속하면서 내천마을로 개칭되었고 서기 1904년에는 천면에 소속하였으며 1914년 3월 금성면 원천리 내천으로 불리우게 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천리(외천마을)
후삼국시대(서기 900년경)에 큰 샘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하여 안쪽마을과 함께 천동으로 불리웠다. 후에 안쪽마을과 구분하기 위해 바깥시암골로 불리웠으며 조선영조 34년(서기 1758년)에는 담양부 천동면에 소속하였고 고종 32년(서기 1895년)에 외천면에 소속하면서 외천 마을로 개칭되었다. 1904년에는 천면에 소속됬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금성면 원천리 외천으로 불리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현리(석현마을)
조선 세종 때(145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돌 많은 고개(가리채)에 마을이 있다하여 석현(石峴)이라 불리웠다. 조선영조 34년(서기 1758년)에는 담양부 천동면에 소속하였고 고종 32년(서기 1895년)에는 외천면에 소속하였으나 1914년 3월 고지 산면의 와룡촌, 산이천리의 일부를 합하여 금성면 석현리 석현 마을로 불리우게 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이 마을에는 면사무소, 농협, 파출소, 면대(중대본부), 우체국, 초등학교, 중학교 등이 소재하고 있다.
석현리(무림마을)
삼국시대 백제 개루왕(서기 15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뒷산이 마치 호랑이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호랑이는 숲이 무성해야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다하여 풍수지리설에 영향받아 이름을 무림동(茂林洞)이라 했다. 조선 영조 34년(서기 1758년경)에는 담양부 천동면에 속하였고 고종 32년에는 외천 면에 소속하였으며 1904년에는 천면에 속하였다. 1914년 3월 금성면 석현리 무림으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성리(정각, 양지마을)
고려 경종때(서기 980년경)에 정각산록 와곡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고려 공양왕 3년(서기 1391년) 까지 율원현에 속하였으며 마을지형이 송아지가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정각(正角)마을이라 불리우게 됐으며, 양지(陽地)마을은 양지촌 이라 불리우다 양지마을로 개칭되었다. 조선 영조 34년(서기 1758년)에는 용천 동면에 소속하였고, 1904년부터는 용면에 소속하였으며, 1914년 금성면 대성리 정각, 양지마을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성리(대성, 봉곡마을)
고려 경종때(서기 9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고려 공양왕 3년(서기 1391년)까지 율원현에 소속하였으며 율원현이 폐현되기전 향교의 대성전이 있어서 대성마을이라 했고, 벌을 많이 사육하여 봉곡이라했다 한다.
조선 영조 34년(서기 1758년)부터는 천동면에, 고종 32년(서기 1895년)부터는 외천면에, 서기 1904년부터는 천면에 소속해 있었다. 서기 1914년부터 금성면 대성리 대성, 봉곡마을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율리(원율마을)
삼국시대 백제때 율지현의 소재지였다. 통일신라 경덕왕 16년(서기 757년)에는 율원현의 소재지였으며 고려 공양왕 3년(서기 1391년)부터 율원현이 담양에 소속됨에 따라 현이 폐지되었다. 조선 영조 34년에 발간된 추성지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고지산면에 속해 있었으며 서기 1904년에는 고면에 속해 있었다. 서기 1914년에 원율 마을로 고쳐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율리(오평마을)
후삼국시대(서기 9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서남쪽 방향에 있는 산의 형태가 자라등과 비슷 하다하여 자라골 또는 자라등 이라 불리웠다. 고려초기에는 율원현 소재지였다. 고려 공양왕 3년(서기 1391년)부터 율원현이 담양에 소속됨에 따라 현이 폐지되었다. 조선시대 자라오자를 써서 오평마을 이라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금성리 (평신기, 부곡, 문암마을 )
평신기 마을은 조선 효종 때(서기 165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본 마을 형성 이전에는 뒷산너머 분단 등불로촌 에서 거주하던 주민들이 괴질로 인해 무곡 뒷산너머 가마실 에서 거주하였고 후에 농경지가 많고 토질이 비옥한 이곳에 터를 잡았다. 평지에 터를 잡았다하여 평신기로 불리운 이래 현재 에 이르고 있다. 문암 마을은 조선 영조 11년(서기 1735년경)에 마을이 형성 되었다. 마을 반대편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금성천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무넘어(물넘어)라 불리웠다. 조선 고종 때(서기 1890년경)에는 실제로 불리웠으며 1914년 문암마을로 고쳐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곡마을은 1760년경(조선영조)에 옥천의 조씨 문중의 황씨 할머니가 광덕리 지금의 문암리에서 두 아들을 데리고 넘어와 가마실에서 여양진씨와 설씨가 함께 살다가 마을에 역병이 번져 못살고 이곳에 터를 옮겨 살았는데 마을 뒷산이 가마솥형이요 그 옆에 통 샘이 있고 뒷골이 굴뚝과 같다 하여 마을 이름을 가마실 또는 가마골로 불러오다가 부곡이라 했다.
금성리(하성마을)
조선 선조때(서기 159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지형이 나룻배 형국이라 하여 주진리로 불리워왔다. 조선 철종때(서기 1855년경)에 산성옆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토성리로 불리웠으며 고종때(서기 1890년경) 금성산성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성마을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덕성리(덕성, 영월, 행정마을)
덕성마을은 통일신라 경순왕때(서기 93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의 주변에 노적봉이 있고 당그래봉이 있어 그 가운대 마을이 위치한 것에 비유하여 노적봉에서 당그래로 곡식을 끌어내려 덕석에 말리는 형국이라 하여 덕석으로 불리웠고 덕석이 점차 덕성으로 변천 조선시대말부터 덕성으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월마을은 마을형성 연대가 명확하지 않다. 조선시대에 호남지방을 순시하던 임금이 편히 잘 쉬어 간 곳이라 하여 언안 이라 불리웠다. 후일 밝은 달이 순창 해미산에 솟으니 그곳에서 달맞이를 하였다 하여 영월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행정마을은 형성연대가 명확하지 않다. 마을에 정자와 은행나무가 같이 있어 행정마을이라 불리웠다 한다.
덕성리(시목마을)
시목 마을은 조선 선조 때(서기1580년경)에 담양 田氏 가 이주해와 13代째 살아오고 있는 곳이며 마을 뒷산에서 옛 기와와 주춧돌 등이 출토되어 田氏 入鄕 이전부터 살아온 옛 터라 전한다. 마을 뒤 白虎 등에 있는 감바위는 순창군 금과면 방축에서 능동, 목동마을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감을 따 이 바위에 앉아 쉬면서 허기를 달래었다하여 감바위라 했다한다. 마을 위치는 도계와 경계해있고 면소재지와는 6Km 지점에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한 지역이다.
봉서리(장항, 대판마을)
장항마을은 조선 연산군 때(서기 15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뒷편에서는 백제 성왕 때 (서기550년경) 주민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옛 기와 주춧돌,샘터등의 잔해가 발견되고 있다. 이곳을 고가지터라 부른다. 노루의 목 부분에 위치한다 하여 장항마을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판마을은 조선 선조 때(서기 15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비탈진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여 대판마을이라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봉서리(와룡마을)
고려 문종 때(서기 1050년경)에 처음으로 海州 崔氏 에 의해 개척된 것을 비롯 1591년경 선조 24년 海州 崔氏 文忠公 天範 이 화순에서 살다가 이 곳에 터를 잡았다. 광산 金氏는 1670년경 창평면 장화리에서 이거해와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 해주 최씨와 광산 김씨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마을 뒷산이 용이 누워있는 형국이라 하여 와룡리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봉서리(비내동 마을)
고려 인종 때에 河氏 들에 의해 개척된 이후 인동 張氏가 안동에서 살다가 개척하였으며 海州 崔氏 文忠公 天範 후손이 입향 하여 살고 있음. 지형이 병풍을 두른 듯 산이 둘러있고 봉황이 알을 품은 듯 하여 마을 이름을 鳳所라 불러오다가 봉서리라 했고, 각처의 봉황이 날아드니 비내동(飛乃洞)이라 했다.
대곡리(대곡마을)
고려 명종 때(서기 117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형성당시 대곡이라 불리어 왔으며 고려 원종때(서기 1270년경)에 지형이 동남북 원형으로 산이 둘러싸여 있어 마치 비단으로 띠를 두른 듯 하다하여 대곡이라 불리워 왔다. 조선 영조 34년(서기 1758년)에 편찬된 추성지에 의하면 당시 고지산면에 속하였으며 서기 1914년 3월 행정구역 개편 대곡리에 소속토록 하여 대실마을이라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곡리(손곡마을)
손곡 마을은 마을형성 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고려 현종때(서기 1660년경)에 봉산면 상덕리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창평면 현암을 거쳐 이곳에 이주한 기록이 있을 뿐 (향사의 맥 3권)이다. 비봉산과 서암산의 지맥이 서북방향으로 뻗어 내려 마치 소가 누워(臥牛)있는 형국이라 하여 손우실(巽牛實)이라 하였으며, 1914년 3월 행정구역 개편시 대곡리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곡리(산이천마을)
산이천 마을은 후삼국시대 때(서기 9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을 형성당시 산곡으로 불리다 조선시대 중엽부터 산이천 마을로 불리웠으며 1914년 3월 행정구역 개편시 대곡리에 편입되었고 대곡 3구로 1995년6월24일 대곡2구에서 대곡3구로 분구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외추리(외추, 노천동, 매곡마을, 마각제)
외추 마을은 삼국시대 사용 토기가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서기 6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 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마을 이름을 추동으로 불러오다가 조선 고종때 외추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노천마을은 통일신라 경덕왕때(서기 75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이름을 양동으로 불러오다가 조선 선조때 (서기 1595년경)부터 노천동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매곡마을은 형성연대를 알 수 없으나 조선 선조때에 이 마을에 거주하던 청계 김응회 창의사에게 선조가 흑매 1폭을 하사하였다하여 어매마을 또는 매곡이라 불리웠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3개마을 모두 외추리로 합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각제는 외추리 매곡 남쪽에서 무정면 봉안리 부안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말처럼 형국을 해 불리어 오고 있다.
봉황리(상신기, 죽림, 가라곡 마을)
상신기마을은 조선 숙종때(서기 17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죽림, 가라곡에 비하여 늦게 형성된 마을로 새로운 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상신기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죽림마을은 조선 연산군때 (서기 15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대숲이 있다하여 죽림마을이라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가라곡 마을은 고려 공민왕 때(서기 1355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가라실로 불리 웠으며 조선시대 부터 가락곡으로 불리운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비봉산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봉황리로 불리운 이래 3개 마을 모두 봉황리로 불리우고 있다.
두장리 두장(斗長)마을
170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마을의 형태가 곡식을 담아 놓은 두지와 같다하여 두지동(斗支洞)이라 불렸다. 1914년행정구역 개편시 용면에 소속하였으며 이때부터 두장(斗長)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두장리 장찬(長贊)마을
162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에 장터가 형성되었다하여 장챙이로 불리어오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두장리 장찬(長贊)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통천리 박곡(泊谷)마을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청주 韓 氏 18세손 한록(병조판서추서)은 아들 홍충과 같이 금산 전투에 참전 하였으나 사태가 여의치 못해 이순신 장군과 합류하기 위해 전라도 지역으로 후퇴하며 대소항전을 계속하였으며 전난이 끝나자 그 지역에 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하고 아들 홍충은 마을 이름을 본인의 자(휴종)과 같은 뜻인 박(泊)자를 사용 박실(泊室)로 하였으며 1914년 행정 개편때 박곡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통천리 매월(梅月)마을
16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주변의 소나무에 흰 학이 많이 살고있어 학유정(鶴遊停)라 불리웠다 한다. 1810년경부터 달빛에 반짝이는 매화꽃 운치가 아름다움 마을이라 하여 매월(梅月)로 불려지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에 개편시 통천리 梅月이되었다.
통천리 통천(桶泉)마을
159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통샘이 있다 하여 통시암 마을로 불리었다. 1914년 행정구역에 개편시 통천(桶泉)마을로 불렀으며, 지금도 통새암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다. 추성리 추성(秋成)마을 163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며, 숲이 울창한 마을이어서 숲거리로도 불리웠고, 숲거리를 둘로 나누어 추성리, 치등리로 부르기도 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천면에 소속되어 있던 신흥리(현 와산마을)와 합하여 추성리(秋成里)로 부르게 되었다.
추성리 와산(臥山)마을
1790년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을 형성당시 새로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고 불리우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말부터 914년 이전까지는 외뫼, 신흥리 등으로 불리워 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천면에서 용면 추성리에 편입되면서 추성리 와산(臥山)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추성리 신흥(新興)마을
1990년 7월 9일 담양군이 장정수조례개정으로 추성마을에서 분리되어 추성리 3구가 되었다. 이때부터 신흥(新興)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쌍태리 쌍태(雙台)마을
조선 중엽 때 마을이 형성되었다. 상월(上月), 태월(台月), 삼태(三台)등 3개 자연마을이 1개 운영마을을 이루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3개 자연마을을 합하여 쌍태리(雙台里)로 개칭하였다.
도림리 도림(道林)마을
16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안쪽마을을 안되뱀이, 바깥쪽마을을 바깥되뱀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도림(道林)으로 개칭하였다.
월계리 월계(月桂)마을
153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주변경치가 달속의 월계수와 같다하여 월계(月桂)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 말에는 복룡(伏龍), 월계(月桂), 월암(月岩), 신령(新令), 월성(月星), 진수동(進水洞) 등의 마을이 있었으며, 담양호 건설로 일부 마을이 수몰되고 지금은 월계마을과 복룡마을을 합쳐 월계리로 총칭 운영되고 있다.
용연리 분통(粉桶)마을
167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에 분재실(粉在實), 통사(桶事)골 등의 지명이 남아있는데 이 지명의 앞글자를 따 분통(粉桶)이라 불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대흥(大興), 분통(粉桶), 용평(龍平), 소천지(小天持), 세룡동(細龍洞), 용동(龍洞), 등과 함께 용연리(龍淵里)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1961년 10월 1일자 조례에 의거 용연리 1구 분통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용연리 용평(龍平)마을
175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앞에 3거리가 있어 3거리로 불렸다. 조선시대 말부터 용평(龍平)으로 불렸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용연리 용평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용연리 용동(龍洞)마을
조선 중엽 때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주변산에 소년암(小年岩)이 있는데 이 바위 이름을 少年村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말부터 6.25전란까지 세용동(細龍洞)과 용동(龍洞)의 두 마을로 존재하였다. 1961년 10월 1일부터 세용동과 용평을 통합 용동(龍洞) 이라 하였다.
용치리 용치(龍峙)마을
마을에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10세기 이전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인근 가마골의 용소(龍沼)와 마을을 경유하는 큰 부래기재(천치고개)와 작은부래기재(견양동고개)가 있어 용치라 불린다. 인근 견양동에는 계곡의 물이 좋아 나환자들이 치유하려고 들어왔으며, 양으로 생활하였다 하여 견양동(堅洋洞)이라 불린다. 1961년 10월 1일 용치리와 견양동을 합하여 용치(龍峙)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용치리 천치(天峙)마을
조선 중엽 형성된 마을로, 하늘 가까운 높은 언덕에 형성된 큰 마을이라 하여 대천치(大天峙)마을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이후 고개를 넘으면 전라북도, 전라북도 평야지에서 농사를 지어 천치로 들어오면 피난처로 용이하여 한때 150호가 거주하는 큰 마을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마을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1961년 10월 1일 용치리 천치(天峙)마을로 변경되었다.
산성리(山城里)와 청흥리(淸興里)
이 두마을은 1976년 담양호 건설로 인하여 마을 전체가 수몰된 마을이다. 정확한 마을형성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산성리에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수백년된 당산나무와 주변의 느티나무 풍치림을 이루었으며, 매년 연초에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산성리는 성안의 성내리(城內里)와 성밖의 구암리(九岩里)와 신정리(新亭里)로 나누어졌다가 1914 행정구역 개편 때 산성리에 통합되었으며, 청흥리는 청수리(淸水里)와 부흥리(復興里), 낙천리(洛川里)로 나누어졌다가 역시 1914년 청흥리로 통합되었다.
산성리에는 1950년 한국전쟁시 마을 전체가 소실되었으나 이후 복구되어 경찰지서와 우체국의 소재지가 되었으나 수몰로 인하여 1974년 현 추성리로 이전하고, 50여 세대 300여 명의 생활터전 또한 옮기게 됨으로써 산성리는 행정구역상 소멸하게 되었다.
산성리, 청흥리 이외 담양호 건설로 인해 수몰된 지역을 보면 용연리 중의 분통마을 일부, 용평마을 일부, 삼거리마을 일부, 용동마을 일부, 월계리 구복마을 일부, 황등마을 일부, 월계마을 일부, 복룡마을과 도림리 일부로 5개리 15개 자연부락 416가구 2,557명의 주민이 이주하게 되었다. 2000년 10월 산성실향민망향기념사업추진회(회장 국종수)에서는 망향의 설움을 달래고 후손들에게 고향을 알리고자 도림리 산203번지 고향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에 망향비를 건립하였다.
월산리 월산마을
980여년경에 형성된 마을로 산막곡(山幕谷)이라 불러왔다. 조선 영조 14년(1758)에 편찬된 추성지에 의하면 당시 산막곡면에 속해 있었다. 고종32년(1895)에는 산면에 속하였으며 지형이 반달을 닮았다 하여 월산이라 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동산마을. 대례마을. 왕산마을 일부와 광면의 장재마을을 합쳐 월산리에 편입된 이래 월산리 월산마을이 되었다.
월산리 장재마을
11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풍수지리학상 재산이 오래가는 터라 하여 장재(長財)라 불렀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십팔곡면을 거쳐 광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월산면에 속하여 월산리 장재마을이 되었다.
월산리 동산마을
9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 영조 34년(1758)에는 산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당시 산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산(東山)마을로 개칭하였다.
월산리 도개마을
1905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형성 당시에는 월고지리(月古之里)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는 동산리로 불리웠다. 1595년 마을 중앙에 있는 또개샘에서 연유하여 도의심을 앙양하자는 道자와 개척정신을 불러일으키자는 開자를 합하여 도개(道開)마을이라 하였다.
월평리 월평마을
1660여년경에 형성된 마을로 당시에는 산막곡면 신평리에 속하였다. 고종 32년(1895) 행정구역 개편시 신평리 아랫마을을 따로 분리하여 월산면 월평이라 이름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평리 월평(月平) 마을이 되었다.
월평리 신평마을
15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이 산아래 형성되어 당시 묘소 곁에서 산막을 짓고 시묘살이 하는 사람이 많아 산막실 (山幕實)로 불리웠다. 조선말엽 아랫마을이 분리되어 월평리로 되었으며 1924년 행정구역 개편시 월평리 신평(新平)마을이 되었다.
월평리 왕산마을
1480여년경에 형성된 마을로 처음에는 王山이라 불렀으나 조선시대 중엽 왕산(旺山)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용천이 마을 앞으로 흘렀 다고 하는데 그 자리에도 마을이 형성되어 고래라고 불리우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왕산마을과 고래마을을 하여 월평리 왕산마을이 되었다.
중월리 중방마을
14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현 중방마을 앞 놋점 대밭에 마을 형성 연도를 알 수 없는 유점리가 있었다 한다. 담양부 산막곡면에 속해있을 때는 중방리, 상중방리, 유점리 등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월곡마을과 함께 중월리에 소속되어 중방(中方) 마을이 되었다.
중월리 월곡마을
산막곡면에 속해 있을 때 옹점리라는 마을이 인근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중방마을과 함께 중월리에 소속되어 월곡(月谷)마을이 되었다.
용흥리 도동마을
160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어 처음에는 독굴이라 하였으며, 담양부 산막곡면에 속하여 창평현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창평현 장북면 소속 월송정 마을을 합쳐 용흥리 도동(道洞)마을이 되었다.
용흥리 가곡마을
15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어 당시에는 창평현 장북면에 속하였으며 죽림(竹林). 가곡(柯谷). 동구(洞口)로 나뉘어져 있었다. 동구마을은 없어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죽림과 가곡을 합쳐 월산면 용흥리 죽림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1988년 용흥 저수지 준공으로 죽림마을이 수몰됨에 따라 가곡이라 하였다.
용암리 용금마을
9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 뒷산에 금광이 있어 황금동으로 불리웠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담양부 산곡면과 황금동리로 불리웠으며 고종 32년(1895)에는 산면 (龍錦洞)으로 개칭하였다.
용암리 홍암마을
마을 뒤에 있는 바위이름을 따 적암(赤岩)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후기 홍암(紅岩)으로 바뀌었으며 고종 32년(1895)에는 담양군 광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광면 능동, 남계마을을 합쳐 월산면 용암리 홍암마을이 되었다.
신계리 용산마을
용산(龍山)마을은 15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박산(朴山)마을은 마을의 형성연대를 확실히 알수가 없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창편군 장북면 용산마을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산면 신계리와 창평군 장북면 유곡. 용산. 신평리와 장성군 북하면 대정리 일부를 합하여 신계리라 하였다.
광암리 사암마을
14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뒤 광대산 기슭에 큰 비석과 같은 방위가 4개 서 있어 네바우 또는 사암(四岩)으로 불리웠다. 조선시대에 담양부 십팔곡면에 속해 있었으나 고종 32년(1895)에 담양군 광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월천마을과 분리되어 담양군 월산면 광암리 사암마을로 되었다.
광암리 월천마을
153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형성이후 십팔곡면 사암 마을로 불리웠으나 고종 32년 담양군 광면에 편입되었고 이때부터 사암마을에서 분리되어 마을 형태와 마을옆 냇물이 흐른다 하여 월천(月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담양군 월산면 광암리 월천마을이 되었다.
광암리 광덕마을
1590여년경에 형성된 마을로 처음에는 매입곡이라 부르다가 머더실로 불리웠다. 고종 32년(1895)까지는 담양부 십팔곡면 덕림리라 하였고 동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담양군 광면에 편입되면서 광덕리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담양군 월산면 광암리 광덕(廣德)마을이 되었다.
오성리, 오성, 내동, 군수동 마을
내동(內洞)마을은 11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고종 32년(1895)까지 십팔곡면 내동리라 불리워지다가 동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담양군 광면 내동리로 불리웠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오성리와 군수동을 합쳐져 담양군 월산면 오성리(五星里)로 부르게 되었다. 군수동(郡守洞) 마을은 1780여년경에 형성된 마을로 마을의 형태가 소의 구시와 같다 하여 구시동으로 불리웠다 한다. 고종 32년(1895)까지 담양부 십팔곡면 오성리에 속해 있다가 동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광면 군수동으로 개칭, 오성리에 분리됐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내동마을과 함께 다시 오성리에 합쳐져 월산면 오성리가 되었다.
월계리 복정마을
169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 되었다 마을 형성당시 관설리로 불리 웠으며 그후 담양부 십팔곡면 복정리가 되었다. 고종 32년(1895)에 담양군 광면 월계리로 개칭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농암리와 옥산촌 및 천면 오정리 일부를 합하여 담양군 월산면 월계리가 되었으며 1961년 10월 1일자 조례에 의거 복정(福亭)마을이 되었다.
월계리 농암마을
170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형성당시 농바우로 불리 웠으며 고종 32년(1895) 이전에는 담양부 십팔곡면 농암리라 불리웠고 동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부터는 담양군 농암리로 개칭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월산면 월계리 농암(籠岩)마을이 되었다.
화방리 마산마을
173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 형성당시 담양부 목산면 관음촌리에 속하였고 고종 32년(1895)에는 담양군 고면에 속하였으며 마을 뒷산의 형태가 말과 유사하다 하여 마산리(馬山里)로 불리웠다 1961년 10월 1일자로 화방리 마산마을이 되었다.
화방리 봉명마을
109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뒷산에 있는 암자의 이름을 따라 관음촌(觀音村)이라 불렀다. 고종 32년(1895)까지 담양부 목산면 관음촌리라 불리웠고 동년 행정개편 이후 담양군 고면 봉명동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개편시에 월산면에 편입되어 화방리 봉명(鳳鳴) 마을이 되었다.
화방리 송정마을
17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 되었다. 마을에 쌍정자가 있었는데 밤에 도깨비가 나온다 하여 괴정마을로 불리웠다 한다. 고종 32년(1895)까지 산막곡면에 속해 있었고 동년 행정구역 개편시에는 산면 송정리와 화방리 두 마을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월산면 화방리 송정(松亭) 마을이 되었다.
수북리
수북면 소재지 마을로서 마을의 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2004.10.1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나산리, 오정리, 대방리, 풍수리 4개 마을의 일부가 편입되어 수북리가 탄생되었다.
나산리
153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지형이 풍흡나대 형이라 하여 나산(羅山)이라 불리웠다. 조선시대에는 창평현 동서면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담양군 수북면 나산마을이 되었다.
개동리
1640년경에 형성된 마을로, 마을을 동쪽부터 개척하고 서로가 돕는다는 뜻에서 개동(介東)으로 불러오다 고종 32년(1895) 새터를 자리잡은 신기마을과 합쳐질 때 개동(開東)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 창평면 장남면에 소속하여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개동이 되었다.
정중리
13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형성당시 정은리(井銀里)로 불리우다 조선중엽부터 정중리(井中里)로 불리웠으며, 조선시대에는 창평군 장남면에 소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정중리가 되었다.
황금리 금구
160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동편에 있는 거북이 형태의 산 모양에서 유래하여 금구(金龜)로 불리웠다 한다. 조선시대 말까지 창평군 장남면에 소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황금리 금구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황금리 황덕
158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장성군 갑향면 운산리, 주동리, 기강리 마을과 담양군 우면 황덕마을이 소재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우면 황덕마을이 소재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황금리 황덕(黃德)마을이 되었다.
고성리 고리대
1280여년경에 마을리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에 창평군 동서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이전까지 신월리, 신복동, 고리, 궁암마을이 있었으며, 동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고성리로 불리웠다. 1961년 10월 1일자로 신월리, 신복동, 고리, 궁암을 합하여 고리대(古里大) 마을로 이름하였다.
고성리 월성산
153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창평군 동서면에 속하였으며, 1914년 이전까지 대평촌, 성산, 화성산, 평성산마을이 있었으며 동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고성리가 되었다. 1961년 10월 1일 담양군 행정구역 조정시 대평촌, 성산, 화성산, 평성산을 합하여 월성산(月城山)마을로 정하였다.
오정리 강동/사창
강동(江洞)마을은 140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1582년 처음 세워진 학구당이 위치한 마을이다. 사창(社倉)마을은 형성연대를 알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창평군 창북면 강동리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동서면의 궁암 일부와 통합, 담양군 수북면 오정리로 불리웠으며, 1961년 담양군 행정구역 조정시 오정1리가 되었다.
삼인동원오정
180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삼인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삼인동(三人洞)으로 불리웠으며, 조선시대에는 창평군 장북면 삼인동과 오정이 이 지역에 소재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오정리로 하였으며, 1961년 담양군 조례에 삼인동과 오정마을을 합하여 오정2리가 되었다.
대방리 송정
14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창평군 장북면 송정(松亭)마을로 불리웠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라 하였으며, 1961년 담양군 조례에 대방1리가 되었다.
대방리 중촌 원대방
1400년 말경 나주인 진의집에 의해 마을이 개척되었다. 진의집이 열심히 공부하여 문과에 급제,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마을에 심었다는 정자나무 두 그루가 마을 중심부에 노거수로 관리되고 있다. 조선조 때 창평현 장북면 지역으로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수북면에 속해 1961년 대방리 2구 마을로 개칭되었다.
대방리 포박, 남전, 진등
191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형성당시 풍수지리학상 大舫(큰배)을 매어 놓은 자리라 하여 포박(浦泊)이라 불리웠다하며, 창평군 장북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대방리가 되었으며, 1961년 담양군 조례에의거, 포박, 남전(纜田), 진등 등 3개 자연마을을 대방리 3구로 하였다. 2001년 농어촌 문화마을 택지가 조성되었다.
궁산리 원궁
17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주산이 활과 같은 지형이라 하여 궁산(弓山)이라 불리웠다 한다. 조선시대에 광주군 갈전면 궁산리가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궁산리로 개칭되었고, 1961년 담양군 조례에 의거, 궁산리 1구 원궁산(元弓山) 마을이 되었다.
궁산리 구암/궁동
구암(龜岩)마을은 13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 왼쪽에 있는 거북모형의 바위가 놓여 있어 구암이라 불리웠다.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갈전면에 속해 있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창평군 장북면 와룡동과 함께 담양군 수북면에 편입되어 궁산리가 되었다.
두정리 경산/두동
1620여년경에 형성된 마을로, 마을의 지형이 고래형이라 하여 경산(鯨山)이라 하였다 한다. 조선시대 광주군 갈전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광주군 갈전면 두동리, 용정리, 경호리, 담양군 고면 구연동 일부를 통합하여 담양군 수북면에 편입, 두정리(斗井里)로 개칭하였다.
주평리 용구
15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용구산의 정기를 받은 마을이라하여 용구동(龍龜洞)이라 불리웠다. 1914년 창평군 동서면 신정리, 가량리, 운연리와 담양군 고면 구연동 일부를 통합, 담양군 수북면에 편입되면서 주평리로 불리웠다. 1961년 담양군 조례에 의거, 주평리 1구 용구마을이 되었다.
주평리 서당/구연
15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에 담양군 고면 구연동이라 불리웠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수북면에 편입되어 주평리가 되었다. 서당(書堂)마을은 구연(龜淵)마을에 속해 있었으며,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어 일제시대 때부터 서당마을로 불리웠다. 1961년 담양군 조례에 의거, 구연마을과 서당마을을 합쳐 주평리 2구가 되었다.
풍수리 월산
18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달과 같다 하여 월산(月山) 으로 불리웠다. 조선시대에는 창평군 장남면에 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 풍수리로 개칭되었으며, 1961년 담양군 조례에 의거, 풍수리 1구 월산마을이 되었다.
풍수리 동상
14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뒷산이 동쪽을 향하여 아침식사 상을 받는 형이라 하여 동상(東床)골로 불리웠다. 조선시대에 창평군 장남면 동상동과 담양군 목면 동상동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에 편입되어 풍수리로 개칭되었으며, 1961년 담양군 조례에 의거, 풍수리 2구 동상마을이 되었다.
풍수리 미산
14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풍수지리학상 고기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마을이 자리잡았다 하여 조선시대에는 담양군 목면 미산리로 불리웠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수북면에 편입되어 풍수리로 개칭되었고, 1961년 담양군 조례 의거, 풍수리 3구 미산(尾山)마을이 되었다.
남산리
137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남쪽산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남뫼로 불리워 왔다. 1704년에 세워졌다는 구산사우(龜山祠宇)터가 마을 동쪽에 유허비만 남아있다. 조선시대에 창평군 장남면 남산리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에 편입되었다.
대흥리 원대흥/만화동
1580여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형성 당시에는 갈연리(갈연리)로 불리웠다. 하며, 조선시대 말에는 창평군 동서면에 소속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담양군 수북면에 편입되어 대흥리(大興里)라 하였다.
大峙里 東部마을
조선 연산군 초기 永川李氏 중시조 習讀公 希曾公이 이곳으로 피난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고 1942년 大峙里로 分區되고 1961년 담양군 조례2호에의거 東部마을로 분리되었다.
大峙里 西部마을
조선조 연산군때 永川李氏 李希曾公이 大峙里로 피난해와 大岾(큰재)이라 칭하고 1910년 大峙面으로 불리다가 1914년 大田面으로 개칭 1942년 大峙里 로 되어1961년 담양군 조례 2호 및 3호에 의거 大峙里 西部마을로 개칭되었다.
大峙里 中部마을
1917년 리동폐합으로 대치리로 통해오다 1942년 대치리를 동,서,남,북부,원촌 5개 마을로 구분 했는데 인구 증가에 따라 1948년 西部,中部마을이 분리되었다.
大峙里 南部마을
약520년전 연산조때 영천이씨 이희증공이 대치 일원에 터를 잡고 정착하면서 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大峙里 新南마을
1963년 담양군 조례 제2호 제3호에 의하여 행정구역을 南部마을에서 새로 나누어져 이룬 마을이라하여 新南이라 부르게 되었다.
大峙里 北部마을
영천이씨 쌍계 이종검의 종제 충장공이 단종복위 탄로로 연루되어 그 증손 이희증공이 용인에서 피신하여 이곳에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어 大峙里로 불리어 오다 1942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北部마을로 개칭되어 불리어 오고 있다.
大峙里 元村마을
연산군 초기에 永川李氏 중시조 습독공 希曾公이 이곳으로 피난왔다. 1931년 이전까지는 광주군 대치면으로 예속되어 있다가 통폐합이후 담양군 대전면으로 되고 인조 병술(1646)년에 대치서원이 창건되어 지방교화에 큰힘이 되었다.
大峙里 大鳥마을
1994년 서옥리에 소재한 육군기갑학교 전차포 사격장 확장에 따라 당초 장성군 진원면 상림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던 新村 環印마을이 사격장 부지로 편입 되어 1995년 주택 37동을 건립 집단 이주 마을이 형성되고 마을지세가 큰 새와 같다하여 大鳥라 한다.
平章里 平章마을 大雅마을
통일신라 신무왕때(서기839년경) 마을이 형성되었고 무진주 서일동 지역에 속하였고 고려때 8대째 平章事가 배출되어 平章洞이라 하였으며 대아마을은 대자암(大慈庵)이 있다해서 大慈로 부르게 되었고 雅泉이 있어서 대아라고 부르게 되었음. 1961년 담양군조례 2,3호에 의거 마을이름을 개칭 평장리로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平章里 花巖마을
서기 1876년경(조선고종)에 마을이 형성도었고 앞산 바위틈과 절벽사이에 진달래꽃과 각종 아름다운 꽃이 피고있어 꽃바위(花巖)이라 불리웠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花雅里로 불리다가 1961년 담양군조례 제2.3호에의거 花岩마을로 다시 부르게 되었다.
西玉里 西玉마을 金谷마을
서기 1800년경에 永川李氏 음곡선생이 순창 동계면에서 이거 정착했고 그후 10년후에 金海金氏 대곡선생이 이거를 해와 금곡으로 불리다가 1910년에 서옥리에 편입 오늘에 이름 - 금곡이란 지명은 金이 나오는 골짜기라는 뜻으로 일제때 금을 캤던 굴이 지금도 있다.
西玉里 靑龍마을
1850년경 경주崔氏 甲烈公이 장성 황룡에서 이거하였고 마을앞의 道林峯을 청용마을이 龍의 如意珠로 삼았다는 地說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中玉里 中玉마을
최고운의 25세손 종길공이 임란때 공을 세우고 순국한후 둘째아들 옥음 경우 공이 대촌면에서 유씨 처록을 따라 선조 말엽에 이주 개척자가 되었고 그후 1880-년경 충주 池氏 문석공이 이거하였 살았으며 지형이 롱주형(弄珠形 이라서 玉山이라 했다는 설과 지내형국의 서오산, 중오산, 동오산 지설이있어 여기가 중오산에 해당된다는 설과 선조때 풍산 이서구공이 지나다가 삼옥(중옥, 서옥, 동옥)이 보인다라고 말해 마을이 중옥에 해당되어 중옥이라 한다.
應龍里 新龍마을
1700년경에 光山金氏에 의해 개척되고 九龍 (청용, 용산, 오용, 봉용, 용두, 생용, 용전, 용강, 신용) 중 응용리가 지금의 신용마을이 해당되어 불리워졌다.
應龍里 應基마을
1840년경에 利天徐氏 德奎公이 광주 지산동에서 이거해옴으로써 마을이 형성되고 지형이 거북이형이라 하나 원래 용어는 "응밑"이라 했으며 "밑"은 "基"이다 마을의 형태가 영산강변의 거북형상으로 보인다 하여 응구로 불 리어오다 조선시대말 응기로 개칭되었다.
台木里 台岩마을
숙종때 聖智라는 神僧이 遊山길에 여기를 지나다 세바위(三岩)를 보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바위는 비록 들 가운데 있으나 이는 三台岩이다 했다. 台는 地說에서 별 이름으로 어떤 所在를 지목하는 말이라 그후부터 台岩마을로 부르는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台木里 木마을
1810년경 맹갓등이라 불려졌는데 영산강을 바라본다하여 望溪라고하여 망계등 이라했고 地目이 맞지않다 하여 태암으로 이거하고 감나무만 초라하게 남게되어 시목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講義里 講義마을
오백년전인 성종때 靑松沈氏에 의해 마을이 개척되었고 마을터가 누런 번북이 내려오는 형국이라하여 黃龜來라 하였고 지금 마을터가 옛날에는 큰 강이 있 었는데 토사로 메워져 마을이 형성됨으로 江河년村이라 불리다 1800년경 순조때부터 講義里로 村名이 되었다고 한다.
月本里 月印마을
1780년경 고려 숙종때 平山申氏 平梧公이 곡성땅에서 이주해 마을이 형성되었고 마을 뒷산이 떠오르는 달과 같다하여 月印峰이 되었고 마을 이름도 月印이 되었고 월인봉은 언양김씨들의 경마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月本里 葛田마을
조선 인조때 (1630년경) 마을이 형성되었음. 지금마을 동편에 兩川玉溪터를 잡아 兩川이라 부르며 살아오다 自然 망하게되자 이곳 갈전 새터로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屛風里 屛風마을
이조 중종때 靈城丁氏 希參公이 영광땅에서 이거 아랫몰(마을)터를 잡았으며 광해 정유년(1627년)南陽房록氏 明達公이 남원에서 이거 뒷밭(뒷골)에 터를 잡았다함, 전에는 창평현 갑향면 內洞이라 불리다가 1920년경 구역측량을 하면서 屛風山의 落脈이므로 屛風里리 命名하였다함. 5개의 자연마을로 나누어져 있으며 (내동, 사장터, 새터, 노은동, 나곡) 나곡은 풍수설에 의하여 風吹羅帶 形(풍취나대형)아라 붙여진 이름이고 서편 魯隱洞마을은 孔子와 관련되는 大成詞와 삼인산,四聖洞이 있어 魯나라를 취해 命名된것이라 한다.
杏成里 杏亭마을
영성정씨 희참공이 1536년 영광불갑땅에서 병풍리로 이거 개척되었고 1917년 일제때 창평현 갑향고을로 불리며 丁.曺.李순으로 입향 영조 원년(1623년)창 평면 행정리에서 1914년 동리폐합 갑향면 행정리로 불리다 1917년 다시 동리가 폐합 玉山마을과 함께 杏成里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杏成里 德津마을
장북면(현창평)에 속했다가 한말에 담양으로 편입 대전면 행성리 덕진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마을 뒤에는 삼인산이 있고 앞에는 서석봉이있어 영산강 평야를 가로질러 유유하 감싸흐르고 동쪽에 영천이 있어 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가는 배의 형국으로 津上加德 곧 나루위에 德을 실었다는 의미로 德津으로 命名 전해왔다.
杏成里 玉山마을
1700년경 조선 숙종때 昌寧曺氏 珽(정)公에 의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公하은 孝子로 孝行이 나라에 주달되었다하여 孝洞村이라 불렀으나 그후 三人山下의 玉女峰의 서기가 효동촌으로 기울여져있어 玉山村이라 개칭 하였으며 1914년 장성군 갑향면에서 1916년 대전면 행성리 옥산마을로 불렀다.
城山里 城山마을
조선 仁祖때 星州李氏 承旨 昌開公께서 영광에서 터를 잡아 입촌하였으며 이어 達城徐氏가 입촌하고 그후 3년뒤에 密陽朴氏 金海金氏가 입촌하였으며 창평에서 平康蔡氏가 이거하여 조선 영조때 창평현 동서면 갑성산(甲城山),花城山,平村등이 있었으나 1914년 행정 구역개편에 의거 담양군에 편입 대전면 성산리로 불리게 되었다.
甲鄕里 四聖마을
조선 헌종 14년 광산김씨 금구현공에 의해 개척되고 리명을 巳生洞이라했다 마을위에 쭉 뻗어오는 능맥이 있어 巳頭穴이라 붙여진 설도 있고 梁,金,姜,林 氏를 사성(四聖)으로 美化 했다는 설도 있다.
甲鄕里 桂谷마을
남평문씨 문덕공이 1736년경 영조때 수북 금구동에서 이주하여 터를 잡았고 마을뒤에서 내려오는 장광맥이 마을 뒤에서 멎고 반월형을 이루니 닭벼슬과 같다하여 鷄谷이라 칭했으나 토끼등은 玉鬼望月形이 명당이 있어 달과 관계되고 월인봉이 있는등 옥귀망월의 계수나무를 연상시켜 지금의 桂谷으로 命名 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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